호주의 원주민

 

백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호주의 역사는 1770년 호주에 첫 발을 디딘 제임스 쿡 선장이 보타니만에 영국기를 꽂고 킹조지 3세의 이름으로 호주 대륙을 영국의 속국으로 선포하면서, 또 그이후 1788년 최초의 백인 이민이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호주 대륙에 이미 6만년 전부터 에보리진(the Aborigines)이라 불리는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원주민(the Torres Strait Islanders)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넓은 땅에서 일년 내내 풍부한 과일과 열매들을 먹으며 영토의 개념도 없이 살았습니다. 땅에서 나오는 '일용할 양식' 을 감사한 마음으로 얻으면 그만이었고, 계절마다 신의 축복에 감사하는 코로보리춤 (Corroboree)을 추면서 제사를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호주 대륙을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한 영국인들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빌미가 됐습니다. 호주 땅을 내 땅이라고 주장할 이도, 그것을 증명할 아무런 자료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의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을 할 필요도,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협상이나 조약 등은 더더욱 필요없었습니다.

 

호주를 점령할 당시 영국인들은 에보리진들을 심지어 인간이 아닌 오랑우탄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바 있는 윌리엄 뎀피어는 "그 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자연의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 있을 뿐이었다."라고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템피어의 보고서는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가 인종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호주 애버리진족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호주의 원주민들의 지위와 권익은 철저하게 무시되어 왔는데(에보리진들은 1967년 이전에는 시민권 조차 없었습니다.), 지난 1988년 호주 이민 200주년 기념 행사 때 원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습니다. 이들은 백인들의 축하 행사장에 나타나서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당신들이 이 땅을 도적질했다. 우리들의 땅을 돌려달라.'라며 격렬한 대규모 군중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에는 양심적인 백인들도 다수 참석을 하였는데 특히 호주의 개신교 연합체인 '연합 교단'은 원주민들이 연방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해당 주 정부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적 투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들은 그 첫 성과로 1992년 호주 대법원에서 내린 '마보 결정(Mabo Decision)'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이끌어내었습니다.에디 마보라는 원주민이 낸 '토착민 토지 소유권 인정' 소송에 대법원이 승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대법원은 '호주 대륙에 주인이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곳에 살면서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다. 비록 서구식 토지소유의 방식을 갖추지 않았다해도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토착민 토지소유권이 인정된다'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은 호주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는데, 영국인들이 호주땅을 식민지로 하면서 근거로 삼았던 '호주땅은 백인들이 당도하기 전까지 주인이 없었다.'는 논리를 전적으로 부정했고, 식민지 국가 건설을 점령이 아닌 약탈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들의 토지 소유권 주장이 사유지에는 해당하지 않고 국유지에 해당하며, 국유지라 하더라도 이미 임대를 받은 사람이 있는 경우(이런 경우가 대부분)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이 결정은 에보리진들이 백인들보다 이 땅에 먼저 정착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적인 판결입니다.

 

호주 최초의 정착민들인 죄수선단이 시드니만에 도착한 이래 땅끝까지 내몰리면서 통한의 삶을 살아왔던 호주 애버리진들의 토착민 토지 소유권 쟁취 운동은 '땅 따먹기 싸움'만은 아닙니다. 원주민 인권 회복 운동의 하나라는 맥락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에보리진 문제는 미국의 인디언 문제처럼 호주 정부가 안고 있는 큰 숙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백인의 정착

 

호주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사실 제임스 쿡 선장이 이 대륙을 영국령으로 선포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06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퀴로스'가 이미 이 대륙에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통과하여 자바섬 쪽으로 향하던 배들이 거센 파도와 바람에 밀려 미처 북쪽으로 방향을 틀지 못하고 이 대륙에 도착하는 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또한 네델란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지에서 탐험가들이 이 대륙을 조사하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호주의 북서부 해안은 황량하기 짝이 없고 사막의 모래 바람만 이는 불모지로 보였습니다. 아무도 이 땅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제임스 쿡이 1770년, 호주의 동남부 해안을 탐험하면서 비로소 이 대륙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미국의 13개 식민지를 잃어 버린 영국은 동양으로 눈을 돌려 교역을 위한 새로운 기회와 미국으로 보내던 죄수들을 수용할 새로운 유배지를 찾고 있었는데 호주가 적임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1788년 1500명의 죄수와 관리, 그밖의 수행원을 거느린 11대의 함대가 시드니 항에 도착하면서 백인에 의한 호주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때 도착한 사람들 중 절반이 죄수였고 나머지는 이들을 관리, 감독할 관료와 이들과 관계된 일반인들이었습니다. 이 함대의 책임자 필립 총독은 함대가 입항한 항구를 영국의 귀족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서 시드니라고 이름 붙혔습니다. 그가 최초로 시드니에 상륙한 날인 1월 26일은 호주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호주는 영국의 유형지로서 개발이 되는데 이후 80년간에 걸쳐 약 16만명의 죄수들이 호주로 들어왔고, 이들은 초기 호주 식민지 개발의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총 16만명의 죄수들 중 여자 죄수는 24,700여명에 불과하여 이민 초기에 호주의 남녀 성비의 심한 불균형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유형 죄수 유입에서 뉴사우스웨일즈주가 111,500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타 죄수들은 빅토리아 주와 퀸즈랜드 주 그리고 뒤늦게 개발이 시작된 서부 호주로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자유 정착민들이 개척을 시작한 남부 호주에는 유형 죄수가 동원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남부 호주에서는 유형 죄수의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은 자유 정착민들의 개척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1840년대까지 호주 대륙은 대영제국의 남태평양 전진기지로 전세계적인 이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850년대 금광이 발견되면서 이른 바 골드 러쉬로 인한 이민 붐이 붑니다. 호주 대륙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기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인구는 급격한 팽창을 하게 되어 1877년에는 200백만을 돌파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840년대 40만에 머물던 호주의 백인 인구가 불과 40년 사이에 5배가 증가한 200백만이 된 것은 전적으로 골드 러쉬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골드 러쉬는 호주 이민사에 가장 중요한 인구 팽창의 계기가 됩니다.

 

또한, 골드 러쉬를 통해 중국계 인구가 급격히 늘게 됩니다. 금광을 비롯한 식민지 개발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멀리 떨어진 유럽보다는 쉽게 싼 임금으로 구할 수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채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호주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이민을 온 사람 보다는 돈을 벌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여타의 이민 집단과는 많이 다른 거주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들은 멜번이나 시드니 등의 대도시와 벤디고와 발라라트 등의 금광 신도시에 폐쇄적인 집단 거주를 이루며 초기 차이나타운을 건설해 백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차이나 타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청국에서 행정 관리를 파견하는 일도 있었으며 중국계 노동자들은 금광에서 발견한 금을 호주 시장에 내 놓지 않고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이질적인 행태로 인해 백인들과 갈등이 생기면서 중국인 유입에 반대하는 백호 주의의 뿌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백인 노동자들은 싼 임금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중국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들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노동당을 창당하면서 정치 세력화하자 이들의 주도로 중국인과 같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반대하는 백호주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1901년 호주의 6개 식민지들이 연방을 구성했을 때의 헌법을 보면 새 나라의 국시를 백인 국가, 유색인 배척, 앵글로색슨족 우선, 영국의 군주를 계속 국가 수반으로 하여 영국에 절대 충성할 것을 골자로 하였으며, 신생 연방 정부가 국가로서 취한 첫 조처는 백인 이민만을 받아들이고 세계의 대다수 민족에 대해 문호를 닫은 맥호주의 정책의 선포였습니다. 호주는 이 후 20세기의 상당한 기간을 거만한 식민지적 시대 착오에 빠진 채 세계의 밑바닥 양지 바른 곳에 격리되어 번영하여 왔습니다. 이 법률은 1973년 철폐될 때까지 전세계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골드러쉬는 호주 역사에서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기가 되는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한편 골드 러쉬의 호황이 지나가자 그전의 호화스러운 생활은 급격히 나빠져서 1890년에는 소비제의 가격이 무너지면서 경제 공황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경제적인 이유와 그밖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1901년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영연방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호주는 6개의 식민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 구역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면서 6개의 구역은 호주의 각 주가 됩니다. 이후 호주는 근대 국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은 하였지만 호주는 여전히 영국과는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민자들도 영국인들을 편애하는 정책을 펴서 영국인들의 이민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1년이 되면 약간 상황이 달라지는데, 미국에서 이민자들의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이 실시되면서 다른 유럽 지역의 이민자들이 대거 호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인들과는 달리 정착에 있어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오직 그들의 일가 친척과 자신들의 마을과 도시 출신의 이민자 인맥에 의존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영국과의 관계는 전쟁에서도 드러나는데,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나자 호주는 재고의 여지 없이 영국의 동맹군으로 참전을 하여 많은 전과를 올립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전쟁의 피해를 입은 유럽에서 또 한 차례 이민자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것은 2차 대전 때 일본의 침공을 받은 호주가 인구를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것과 맞물려 호주의 인구는 다시 한 번 급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5년부터 약 5백 5십만명이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됩니다.  이런 전후의 대규모 이민을 계기로 호주의 2차 산업이 발전을 하게 되었고 전반적인 경제 성장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50여년간 호주의 2차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어서 수출에 있어 양모와 광물같은 1차 산업의 비중이 점차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1973년 백호주의가 공식적으로 철폐되면서 다양한 인종들이 이민을 오게 됩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베트남의 공산화로 야기된 대규모의 난민의 유입이 있었고, 그 이후 1980년대, 호주 정부가 다문화 주의가 선택하면서 더욱 개방된 이민의 문호로 말미암아 더욱 다양한 나라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져, 호주는 점점 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다민족 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현재 호주 인구 중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는 전체 인구의 2/5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민 문화는 호주를 현대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호주는 미군을 위해서 참전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TV 프로그램의 다수가 미국 프로그램이고, 상당수 라디오 방송은 미국 주파수에 맞춰져 있으며 미국 문화가 호주의 생활 방식 속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다는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호주인들과 영국과의 유대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리적으로 보다 가까이 있는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과의 유대가 경제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이들 지역 국가와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호주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때 영국보다는 아시아에 속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고, 더 나아가 영연방에서 벗어나 공화국을 설립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젊은층을 중심으로 공화국 설립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반 이상 된다고 합니다.), 나이든 세대는 여전히 호주의 전통을 고수하자는 입장입니다.

 

호주의 정치 체계

 

호주의 정부 체계는 영국과 북미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비록 영국 여왕이 공식적인 호주의 여왕이지만 호주는 기본적으로 독립 국가입니다. 여왕이 멀리 영국에 있기 때문에 총독이 여왕을 대신하여 호주에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며 호주에서 여왕은 주로 형식적인 역할을 할 뿐입니다. 2001년에 호주 연방은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백년 전에 연방 정부와 여섯 개의 주(퀸즐랜드, 서호주, 남호주, 빅토리아, 타즈마니아, 뉴 사우스 웨일즈)로 권력이 분산되었습니다. 연방 정부의 임무와 권력은 미국처럼 성문 헌법으로 되어 있고, 방위, 외교, 이민, 관세 및 체신청에 관한 의무와 책임이 수록 되어 있습니다. 각 주들은 교육, 내부 수송, 보건 및 치안과 같은 그 지역의 고유한 업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법률은 총독과 연방의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입법화됩니다.하원은 몇몇 정당의 대표자로 구성됩니다. 집권당, 즉 연방 정부는 하원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되며 집권당의 대표자가 수상이 됩니다.

 

상원은 각 주와 준주를 대표하며, 집권당을 감시해서 권력 남용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상원은 모든 주를 동등하게 대표하며 의회에서 하원과 동일한 권력을 갖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결정들이 호주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자크 데이(Anzac Day)

 

호주의 군인들은 용감하기로 유명합니다. 자국의 전투가 아님에도 1,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도 참전하여 군인 1,538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투기 조종사 42 명을 잃었습니다. 또한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였습니다.

 

호주군과 관련된 국경일로서 안자크데이라는 공휴일이 있습니다. 이날은 매년 4월 25일인데 다른 어떤 국경일보다 더 활발한 기념 행사가 벌어집니다. 안자크(Anzac)는 호주 뉴질랜드 육군을 줄인 말로서 그 군대에서 복역한 병사들을 가르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원래 안자크 데이는 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5년 4월 25일에 호주와 터키 군들 간에 벌어졌던 전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날 호주와 호주의 동맹국들은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병사들은 예정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상륙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공격하기에 적합한 평평한 해안이 아니라 벼랑이 있는 곳에 상륙을 한 것입니다. 8개월 간의 전투기간 동안 적군은 병사들을 향해 사정 없이 발포를 했으며 8천명 가량의 안자크 군이 죽었습니다.

 

이 전투가 실패로 돌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인들이 안자크 병사들을 영웅시 하는 것은 그들이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용감하게 싸웠고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 것은 병사들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에 의해 엉뚱한 곳에 상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안자크 데이에서 호주인들은 인간 정신의 승리와 "동료 의식"이라는 호주의 정신을 기립니다. 그후 안자크 데이는 호주가 참전한 모든 전투와 전쟁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는데, 전쟁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동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충일과 국군의 날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날은 군인 뿐 아니라 모든 간호사와 의료진과 같이 보조 역할을 했던 사람들까지도 기리는 날입니다.

 

호주의 한국인 이민

 

1970년대 이전의 호주는 전통적으로 백호주의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이민은 거의 없었고 콜롬보 계획 장학금 수혜 공무원과 소수의 유학생들이 체류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3년 노동당 정권에 의해 백호 주의가 철폐 되면서 지질 학자, 헬리콥터 조종사, 교사 등 소수의 전문 기술자를 중심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고, 그 후 파월 기술자들이 70년대 중반에, 그 후엔 남미 체류자 및 중동 취업 근로자들이 계속 입국하여 1980년에는 한국 교민의 숫자가 약 6,000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이후 입양 가족 초청 이민, 취업, 사업, 투자 이민, 유학 등으로 한국 교민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호주의 경기가 침체하면서 이민 쿼타가 감소되고 이민 심사가 강화되었고 또한 상대적으로 한국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민의 숫자는 감소하여 왔는데, 98년 한국이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IMF 이후에는 관광이나 유학 비자로 들어온 한국인들이 불법 체류하는 일이 많아 지면서 한국의 비자 발급 기준 등급이 격하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 호주 내의 한국인 숫자는 약 4만 5천명 정도인데 이중 80%에 달하는 약 3만 4천명 정도가 뉴사우스 웨일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90% 정도는 시드니와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구성을 보면 기술 이민이 31%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가족 이민이 24.6%, 뉴질랜드 경유 이민이 44.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포들은 타 소수 민족에 비해서는 비교적 생활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대체로 영세한 편입니다. 대부분이 노무(청소업등), 숙련, 사무, 요식, 숙박, 여행 서비스, 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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