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애들과 한국에서 사가지고 간 시나본 케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으려니 후배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대학 합창단 후배로 우리 가족이 호주에 온 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후배입니다. 지난 구정 때 제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도 하루종일 시드니 관광을 시켜줬던 고마운 후배입니다. 내가 온다고 하니 공항까지 마중나오겠답니다. 덕분에 시드니 시내까지 교통편을 해결할 수 있었고, 시내 관광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관광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덕에 시드니 항구의 크루즈 상품을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번 여행에서도 마지막 날 시드니 시내를 둘러보기는 하였으나 주마간산격으로 휙 둘러 봤던 터라 이번에 하루를 더 시드니 관광에 쓰기로 하였습니다. 락스 지구 근처를 다시 한 번 둘러 보고 시드니 항구를 바다에서 둘러보는 씨크루즈도 한 번 타보고 시내 구경도 좀 더 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드니에는 명물 핫도그 집이 있다고 합니다. 1945년부터 시작된 핫도그 집인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들릴만큼 유명한 집이라고 하여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사람이 많이 붐비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지도 않고 모양도 우리 나라의 노상 핫도그 점처럼 바퀴가 달린 이동식 노상 핫도그 점이고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그렇게 유명하다니 놀랍습니다. 가게의 정식 이름은 'Harry's Cafe de Wheels'입니다. 번역하면 '해리의 바퀴달린 노상 카페' 정도 되겠지요? 그런데 형섭이가 이 핫도그 점을 보더니 '아! 아빠 저도 저것 먹어봤어요. 뉴캐슬에도 있어요' 합니다. 아마 뉴캐슬에도 체인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핫도그집이란 것은 이 핫도그 집 벽면을 장식한 수많은 유명인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아마 호주의 수많은 유명 인사의 사진들인 듯 합니다.

서양의 핫도그는 우리나라의 핫도그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처럼 튀김옷을 입힌 소시지를 튀겨서 먹는 것이 아니고 소시지 모양으로 길쭉하게 생긴 빵을 반 갈라서 속에다 소시지를 넣고 소스를 뿌린 뒤 먹는 것입니다. 속에 넣는 소스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핫도그 맛의 노하우인 것 같습니다.

유명한 집임에도 불구하고 의자가 전혀 없어 가게 뒷편의 부둣가 있는 벤치에 앉아서 갈매가와 함께 먹어야만 했습니다. 군데군데 갈매기의 배설물이 있어 옷을 버리지 않게 주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핫도그란 것이 빵 속에 소시지 이외에 소스를 비롯하여 들어간 것들이 많아서 한 번 베어 먹을 때마다 빵사이로 내용물들이 비집고 나오는 바람에 흘리지 않고 먹으려면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처음먹는 저는 요령이 없어서 어린 아이들 처럼 많이 흘렸습니다. 손과 옷을 버리면서 먹고 있으니 아니나다를까 바로 집사람의 핀잔이 날아옵니다. 어른이 칠칠치 못하게 흘린다면서, 그리고는 큰 녀석이 음식 지저분하게 먹는 것은 다 아빠 닮아서라고 말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워낙 많이 들었던 소리라 이젠 씩 웃고 치웁니다. 제가 사실 음식먹으면서 잘 흘리거든요.  

핫도그를 먹으면서 바라보는 항구의 모습이 좀 다릅니다. 알고봤더니 이 가게 뒷편의 부두는 군함이 정박해 있는 항구로 이번 이라크 전쟁때 파병된 군함도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군함이 정박해 있는 부두에는 일반인들이 가까이 갈 수 없는데 이곳은 바로 눈앞에서 군함을 볼 수 있습니다. 군사 보안에 문제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침 식사 대용으로 빵을 먹은데다 핫도그까지 먹고나니 배가 제법 부릅니다. 조금있다 씨 크루즈 할 때 또 뷔페식 식사를 제공한다는데 큰일입니다. 뷔페에서 많이 못먹으면 왠지모르게 손해본 것 같지 않습니까? 다행히 지금부터는 걸어서 구경다닐텐데 걸어 다니는 동안 소화가 좀 빨리 되기를 바래야 겠습니다.

후배의 조언에 따라 시드니 항, 써큐러 키에서 시작되는 씨 크루즈를 가기 전에 주립 아트 갤러리(Art Gallery of NSW)와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을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1874년 개관한 아트 갤러리는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층은 20세기 이전의 미술품과 20세기 이후의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었고 2층은 에보리진과 관계된 토속 미술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전번에 왔을 때 이곳에서는 피카소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도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들어와 봅니다.

서구의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들은 관람료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20세기 이전 작품들이 전시된 곳으로 들어갔는데,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았던 르네상스 풍의 많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호주인인데다 제가 워낙 미술에는 문외한이라 이름을 알 수 있는 작가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림들은 모두 훌륭해 보입니다. 이 시대의 미술품들은 제같이 미술품을 보는 눈이 크게 없어도 쉽게 감상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특히 한 코너에는 개인 소장 작품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비록 채색화가 아닌 스케치, 판화 등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다수의 램브런트 작품을 볼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시간만 많다면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겠지만 씨 크루즈 출발 시간 때문에 현대 미술 전시실은 주마간산격으로 후다닥 둘러보았고 이층은 아예 올라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트 갤러리의 바로 앞은 왕립 식물원 (Royal Botanic Garden)입니다. 역시 입장료는 없는데 일요일인데도 이곳을 찾은 사람은 크게 많지 않습니다. 상당히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깔끔하게 단장된 아름다운 식물원인데, 식물원이란 인상보다는 잘 가꿔진 공원 같은 느낌이 많이 듭니다.

 식물원을 둘러보다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났습니다. 12시에 씨 크루즈가 출발하는데 벌써 11시 40분입니다. 식물원 아래쪽은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광장이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배가 출발하는 써큘러 키입니다. 온 식구가 복잡한 인파 사이를 거의 뛰다시피 해서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시드니 항에는 여러 종류의 씨 크루즈가 출발하는데 우리가 탄 배는 자그마한 배입니다. 한국 여행사와 연관이 있는 듯, 배 안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보입니다. 배 안에는 점심 뷔페가 준비되어 있는데, 뷔페라고는 하나 아주 간단한 메뉴입니다. 핫도그 먹은 후 아직 소화가 충분히 되지 않았는데 차라리 다행입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배가 출발합니다. 써큘러 키를 출발한 배는 하버 브릿지 아래를 통과해서 시드니의 새로운 항구의 하나인 달링 하버로 향합니다. 여기서 승객을 좀 더 태우고 다시 한번 하버 브릿지를 통과한 배는 시드니 항구 바깥편으로 나아가며 해변의 다양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시드니가 왜 세계 3대 미항에 꼽히는지는 육지에서보다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와보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육지에서 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바다에서 바라보는 시드니 항구의 다양한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버 브릿지, 오페라 하우스 등의 호주의 상징처럼 된 구조물들과 락스 지구의 고풍스런 건물들, 그 뒤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의 스카이라인 등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고, 특히 때맞춰 시드니항구로 항해해 들어오는 수많은 요트들과 어울어진 모양은 정말 장관입니다.

호주는 남한 면적의 70배가 넘는 영토를 가졌지만 인구는 2천5백만 정도밖에 안되는 나라입니다. 넓은 국토에 인구는 적으니 자연히 사람이 살기에 최적인 입지를 가진 곳에 모여 살 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시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토지를 가진 해안가를 따라 발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양스포츠가 발달하게 되는데, 써핑은 젊은이들이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이고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목표는 요트를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1시간 30분 쯤 걸리는 씨 크루즈를 마치고 시내 구경을 좀 더 하기로 하였습니다. 락스 지구에서 조지 스트리트를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유명한 퀸빅토리아 빌딩(Queen Victoria Building)이 있습니다. 호주 사람들은 QVB라고 줄여서 부르는데, 1890년대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입니다. 원래는 생산물 시장으로 이용되었다가 상당한 기간 동안 방치되었었는데, 1984부터 1986년에 걸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친뒤 퀸빅토리아 쇼핑 센터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은 이 건물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센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틴 플레이스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오른쪽 편으로 QVB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은 시드니에서 가장 붐비는 곳인가 봅니다. 차와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100년이 넘은 건물답게 건물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보수공사를 한 덕분인지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철제 난간과 고풍스러운 타일, 은은하고 포근한 조명 등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QVB는 건물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습니다. 엘리베이터나 화장실도 1800년대 스타일 그대로 보존해 둬서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도 오래되고 유서깊은 건물들을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부수고 새로 짓지 말고 이처럼 잘 보존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쇼핑센터에 갖춰진 상품들은 비교적 고급품 위주인 것 같습니다. 집사람 티셔츠를 하나 골라보려고 들어갔더니 상당히 비쌉니다. 몇군데 둘러 보았으나 딱히 마음에 드는 디자인도 없고 해서 물건 사는 일은 그만두고 그냥 구경이나 하기로 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니 저절로 연주되는 그랜드 피아노가 눈길을 끕니다. 야마하 피아노였는데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는지 저절로 건반이 눌러지면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한쪽 편으로 환한 조명을 받고 있는 유리로 된 쇼 케이스가 보입니다. 속에는 인형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대영 제국의 영광을 가져왔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실물 크기 밀랍 인형입니다. 그녀의 대관식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그 당시 입었던 옷과 왕관, 그밖의 악세서리들이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호주에서 영국의 채취는 이처럼 깊고 진합니다.

이 쇼핑 센터의 또다른 명물은 실내의 천장에 장식된 시계탑입니다. 매 시간 정각에 영국 왕실의 6대 사건들을 재현하는 인형들이 나와 쇼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간 시간이 어중간한 시간이라 이 쇼를 보려면 상당히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쇼핑 센터 지하는 기차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침 스트라스필드로 가서 애들 이발을 시켜야 했는데 잘되었습니다. 스트라스필드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 국철과 마찬가지로 시내 중심가에서는 지하철로 운행이 되고 외곽으로 나가면 지상으로 나가 일반 열차가 됩니다. 호주의 열차는 특이하게도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층 좌석에 앉으면 전망이 조금 더 좋고 1층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2층으로 만들다 보니 공간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열차처럼 좌석 위쪽에 선반이 없습니다. 많은 짐을 가지고 타면 좀 불편할 것 같습니다. 열차의 시설이나 청결도는 우리나라의 우등 열차 수준쯤 되는 것 같고 우리나라 열차나 지하철에 비해 손님은 무척 적습니다. 좌석의 반도 채우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스트라스필드는 시드니의 한인 타운이 형성된 지역입니다. 이 역에 내리면서부터는 서양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고, 상점 간판에는 한글이 같이 적혀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침에 만났던 후배 역시 이 지역에 살고 있는데 후배가 거주하는 아파트 근처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장원에 우리 애들 이발을 위해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예약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근처의 수퍼에 들러 반찬거리, 간식거리를 구입했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상품이 한국제 또는 호주내에서 생산된 한국명 표기 상품들이라 마치 한국에 온 듯합니다. 이곳에서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도 충분히 살아갈 것 같습니다.

예약 시간이 되어 미용실에 들러 이발을 시키고 나니 애들의 인물이 딴 인물이 되었습니다. 역시 한국인의 머리는 한국인이 다듬어야 제 모양이 나는 모양입니다.

후배는 관광업계에 근무하기 때문에 오늘도 출근을 했습니다. 아침에 우리를 시내까지 태워주고 낮시간 동안 근무한 뒤 퇴근 시간 후 다시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었습니다. 스트라스필드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카지노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이라 가격이 무척싸면서도 맛은 근사합니다. 어느 나라를 가나 카지노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은 맛있는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모양입니다. 하루종일 많이 걸어다닌 탓에 배가 출출하던 차에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호주의 카지노는 정부에서 운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도박을 즐길 수 있게는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도박 중독증에 걸린 사람은 특별 리스트에 올리고 카지노 출입을 제한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도박에 빠져 거액을 날린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승소 판결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잘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후배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8시 20분 뉴캐슬 행 열차를 탔습니다. 시드니에서 뉴캐슬까지는 160 Km 정도 떨어져 있고 기차로는 2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러나 오늘은 뉴캐슬까지 가는 중간에 공사 구간이 있어 그 구간에서는 열차를 내려 셔틀 버스로 이동한 뒤 다시 열차를 타야 한다고 합니다. 호주에서는 일요일에 열차를 타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선로를 보수하는 일을 공휴일에 하는 것이지요. 물론 셔틀 버스는 철도 당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구요.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 뉴캐슬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자정이 가까울 무렵입니다.

4개월전 들렀던 그 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몇 달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집안은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고 변한 것은 없더군요. 기온이 썰렁한 것만 빼구요. 너무 늦은 시간이고 아이들은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해서 대충 정리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첫 날부터 제법 강행군을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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