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이 밝고 있습니다. 오늘은 헌터 밸리를 가기로 했습니다. 오전에는 골프를 치고 오후에는 와이너리를 돌아보며 와인을 좀 구입해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골프를 칠 때 애들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골프치는 것이 꼭 가족 소풍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오면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골프를 치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이 됩니다.

지난 6월에 일주일 여정으로 이곳에 왔을 때 1박 2일로 머물렀던 사이프러스 리조트(Cypress Resort) 내에 있는 골프 코스에서 게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티업 시간이 7시 30분으로 이른 시간이라 아침 먹기가 마땅찮아서 리조트 내에 있는 조식 뷔페를 먹기로 하고 5시 30분 쯤 집을 나섰습니다. 주위는 아직 캄캄합니다. 헌터 밸리까지는 약 1시간 쯤 걸립니다. 차를 몰고 한 30분 쯤 가니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먼동이 틀 무렵 광할한 초원으로 차를 모는 기분은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6시 40분 쯤 리조트에 도착해서 프로샵에 들렀더니 우리 팀의 티업 시간이 7시 30분이 아니고 8시 40분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7시 30분은 그 전에 예약했다가 취소한 딴 골프 클럽에서의 티업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거의 2시간 가까운 시간이 남게 되어 아침 식사는 아주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고, 식후에도 연습 그린에서 퍼팅 연습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프러스 골프 코스는 지난 6월에 왔을 때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이미 한 번 플레이를 해 봤던 코스라 코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처음 가는 골프 코스는 새로운 코스를 경험하는 재미는 있으나 코스가 낯설어서 플레이를 제대로 즐기는데는 지장이 있습니다. 두 번째 갈 때는 코스도 어느 정도 익숙해 져 있어 주위의 경관도 즐기고 코스의 난이도 등을 제대로 고려하면서 플레이를 할 수 있어 첫 번 째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이 리조트의 이름은 사이프러스(Cypress)라는 나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측백 나무과에 속하는 키가 큰 원추형 교목으로, 단단하고 질긴 황적색의 나무 껍질에, 회갈색 열매가 열린다고 합니다. 지중해 지역, 특히 그리이스에 많이 자라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중해의 키프로스(Kypros)란 섬나라에서 특히 숭배하는 나무로 이 나무의 이름은 키프로스의 영어식 발음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 리조트에 많이 심어져 있는 침염수가 바로 그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골프 코스는 전반 9홀은 리조트가 위치해 있는 산지에 조성된 마운틴 코스로 울창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배경으로 다양한 굴곡의 페어웨이와 벙커를 가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코스입니다. 티 박스에서 그린이 보이지 않는 곳도 많고, 페어웨이 한 가운데 벙커가 있어 오른쪽, 왼쪽을 확실하게 결정하고 티샷을 해야 하는 등 코스 매니지먼트를 잘 해야 스코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처음 와서는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후반 9홀은 링크스 스타일의 코스입니다. 산 아래에 조성된 포도밭 사이의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가며 코스를 만들어 놓아서 전반 9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을 연출합니다. 전반적으로 후반 9홀이 조금 쉽게 느껴지는데, 전체적으로 국내의 골프 코스 수준과 비교해서 좀 어려운 편에 듭니다.

두 번째 방문한 사이프러스 골프 코스는 3개월 전과 다름없이 아름답고 관리도 잘 되어 있었지만 최근 그린을 대대적으로 손보는지 그린에 온통 모래를 뿌려놔서 퍼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18개 홀 모두 그런 상태여서 짜증이 날 지경입니다. 호주에 와서 골프를 치면서 항상 그린의 상태가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영 딴 판입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지금의 계절이 한국으로 보면 3월 중순쯤의 초봄에 해당하므로 겨울 동안 성장을 멈췄던(이곳은 날씨가 온화해서 겨울에도 잔디가 죽지 않습니다.) 잔디들이 이제 기지개를 켤 시점이어서 거름도 주고 모래도 뿌리고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을 잘못 고른 탓이지요.

애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동행하면서 카트도 몰아주고 채도 정리해 줍니다. 한국에서도 골프가 이렇게 온가족이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좁은 국토, 비싼 땅값 등으로 인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네요.

어제는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탄 여독이 있어서인지 초반에는 공이 잘 안맞았었는데, 오늘은 적당히 몸이 풀려 컨디션이 좋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스코어는 어제보다 못합니다. 어제는 칩인 버디와 4미터의 경사가 심한 내리막 버디 퍼팅을 성공시키는 등 2개의 버디를 기록했었는데, 오늘은 1미터 남짓한 버디 퍼팅도 놓칩니다. 그린의 컨디션이 워낙 안좋아서 퍼팅이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게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게임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장기가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리조트 내의 식당에서 소시지 롤, 미트 파이 등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헌터 벨리의 와이너리 방문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전까지는 와인을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몇 번의 호주 방문 중에 와인에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와인이라는 것이 처음 먹을 때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주 먹게 되면 그 맛에 빠져들 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다른 술과는 달리 와인은 수 많은 와인 농장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모두 맛이 틀리고 심지어 같은 농장에서도 수십종의 와인을 생산하는데 이들의 맛이 또 조금씩 틀리기 때문에 종류를 바꿔가면서 각기 다른 맛의 와인을 맛보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술에서도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헌터 밸리 와이너리에 입주해 있는 맥귄이라는 상표의 와인 창고에 가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Genus4'와 'Black Label Shiraz'라는 상표의 와인을 몇 병 구입했습니다. 이 와인은 호주 와인의 대표 품종이라고 할 수 있는 '쉬라즈(Shiraz)'라는 포도를 주원료로 한 와인입니다. 쉬라즈는 프랑스 '론(Rhone)'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는 '시라(Syrah)'라는 포도를 호주에서 재배하여 만든 포도주로서 호주의 가장 대표적인 와인 품종입니다. 비교적 맛이 강하고 건조한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와인을 구입한 후 근처에 같이 있는 기념품 점을 둘러 보았습니다. 마침 야외 광장에는 무명 가수의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전자 키보드를 두드리며 혼자 노래하고 있는데 제법 많은 관객들이 구경하고 있습니다. 인근 가게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으며 우리도 한참 구경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이를 배경으로 게으르게 오고가는 사람들,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무명 악사의 음악을 즐기는 여유......

우리가 한국에 돌아간 뒤에도 이 헌터 밸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풍경은 오랫도록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앞집의 프랭크 할아버지의 큰 아들인 마크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후 4시까지는 뉴캐슬에 돌아와야 합니다. 이제 슬슬 짐을 챙겨야 합니다.

프랭크 할아버지의 손녀이자, 마크의 둘째 딸인 세라는 윤섭이와 같은 반이기도 하고 피아노도 같이 배웁니다. 또한 세라와 그녀의 남동생인 알랙스는 학교를 마치면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할아버지 집에서 노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과 우리 애들은 이미 아주 친한 사이입니다. 마크는 지난 번 저의 방문 때부터 우리를 자기 집에 한 번 초대하기를 원했었는데 그때는 딴 일정 때문에 시간을 못 냈었고, 그래서 이번에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저녁에는 또 식사 약속이 있어서 간단하게 차나 한 잔 하고 오기로 했습니다. 정말 공사다망하죠?

마크의 집은 뉴캐슬 도심에 있는 거대한 숲인 블랙벗 숲과 붙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양 집처럼 출입구는 도로와 접해 있고 마당은 뒷편에 있는데, 이 마당이 바로 숲과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경관이 대단히 좋은 집입니다. 집은 지어진지 제법 된 듯하여 외관은 크게 좋아보이지 않지만, 다른 대부분의 호주 집처럼 내부는 정성들여서 유지 보수를 한 탓에 아주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습니다. 특히 거실 창과 배란다를 통해서 보이는 블랙벗 숲의 울창한 나무들은 마치 이 집이 깊은 산중에 지어진 별장인 듯 느끼게 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배란다에 앉으면 하루의 피로가 일시에 가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리 돈을 들여도 도심 한가운데에서 이런 경관을 가진 집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넓은 국토에 사는 이네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면입니다.

집안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 애들과 이집의 애들은 블랙벗 숲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파이를 곁들인 커피와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마크는 자녀들의 나이(장녀가 중학교 다닙니다.)나 겉 모양등으로 봐서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이 묻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크의 나이 뿐만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프랭크 할아버지나 피터 할아버지 부부의 정확한 나이도 잘 모릅니다. 그저 60대 중 후반 정도로 짐작할 뿐입니다.

마크가 우리집 홈페이지가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입니다. 마침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가 거실에 있어서 우리집 홈페이지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집 홈페이지 주소를 적어넣고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Oh my god!',
전화 모뎀입니다.

우리집 홈페이지는 사진이 무지 많은데, 이들 사진을 띄우는데 세월아네월아입니다. 한 7-8년 전의 우리 나라 인터넷 보는 기분입니다. 프랭크 할아버지가 소개된 사진이 들어있는 페이지 띄우는 데 근 5분 쯤 걸린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 나라가 인터넷 강국임을 실감했습니다. 한참 뒤 모니터에 사진이 나오자 이집 식구들은 모두 인터넷 상에 올라가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척 즐거워 하더군요.

이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실천에 못 옮긴 것 중 하나가 가족 홈페이지의 영문화 작업입니다. 애들 영어 공부도 할 겸 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영어 버전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어 버전을 완성한다면 식구들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도 호주의 지인들과 홈페이지를 통해서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적으로 추진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제 힘으로 안되니 애들을 닥달해야 겠지요.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고 아쉽지만 일어서야 했습니다. 이들도 그후에 스케쥴이 있고 우리 또한 다음 스케쥴이 있습니다.

저녁에는 뉴캐슬 대학의 한국인 교수인 김호성 교수님에게서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습니다. 교수님 집 앞마당에서 열리는 바비큐 파티입니다. 우리 가족과 호주의 한국인 교포 두 가족이 초대 되었는데, 물론 우리 가족이 주빈입니다. 교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 가족이 일년 정도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일텐데 이렇게 매번(지난 두 번의 방문 때도 이들은 우리 가족을 초대했었습니다.) 마음을 써 주시는 것이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교수님은 오늘의 파티를 위해서 그동안 미처 끝맺지 못했던 정원 보수 공사를 서둘러 마치고, 시드니까지 가서 한국식 갈비를 사오셨다고도 하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교수님 댁에 도착해 보니 현관에 '뒷 쪽의 정원으로 돌아 오세요'라는 안내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뒷 쪽으로 돌아가니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끝나 있습니다. 교수님 집 역시 정원이 블랙벗 숲과 연결되어 있는데, 잘 꾸며진 정원과 그 너머의 숲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생깁니다.

바비큐 파티의 메뉴는 한국식과 호주식을 적당히 섞은 절충식입니다. 한국식 갈비와 꼬치 요리, 잡채, 김치, 밥이 준비 되어 있고 호주식 소시지 구이와 햄 등이 곁들여 졌습니다.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와 함께 구워 먹는 바비큐의 맛은 정말 일품입니다.

함께 초대된 한국 교포들은 모두 간호사 출신의 여성분들이었는데, 호주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 분은 호주인 남편과 아들도 같이 동반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집안으로 자리를 옮겨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밤 늦도록 나눴습니다. 한동안 DVD 본다고 조용하던 애들이 지겹다고 야단입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5시에 파티를 시작했으니 근 6시간이나 놀았네요.  이제는 정말 일어서야 할 시간입니다.

4일간의 일정으로 왔으니 짧은 만남이 당연하지만 벌써 내일이면 돌아갈 날입니다. 오늘이 이번 방문의 마지막 밤이구요. 추석 다음 날이라 돌아오는 길에는 휘엉청 밝은 보름달이 밤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추석에 보름달을 구경한 몇 안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음날 안 사실이지만 그 시간 우리나라는 보름달이 문제가 아니라 온통 난리가 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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