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F의 호주 방문기 3

셋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헌터 밸리를 가기로 한 날입니다. 뉴캐슬의 서쪽으로 내륙 지역에 헌터 지역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 헌터 지역은 어퍼 헌터와(upper Hunter) 로어 헌터(lower Hunter)로 나뉘어 지는데 어퍼 헌터 지역은 석탄광들이 많은 곳이고 로어 헌터 지역은 호주에서 제일 유명한 포도주 생산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어퍼 헌터와 로어 헌터 지역의 모습입니다. 무척 대조적이죠? 왼쪽은 어퍼 헌터 지역의 석탄 광산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은 로어 헌터 지역인데 포도 농장과 포도주를 주제로 한 여러 가지 관광 상품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뉴캐슬은 석탄과 철광석 수출항으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곳인데, 이 항구로 수출되는 석탄의 많은 부분이 어퍼 헌터 지역에서 생산된답니다. 지하 광산도 있지만 노천 광산이 많다고 하니 석탄 캐기가 아주 쉽겠죠? 로어 헌터 지역에는 50개가 넘는 포도 농원들이 있고 이 농원들에서 생산된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를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지역은 포도 농원 관광과 포도주 시음 프로그램을 주된 아이템으로 해서 여러 종류의 관광 상품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시드니에서도 이 헌터 지역으로의 포도 농원 방문 관광이 꽤나 인기를 끌고 있답니다. 우리도 오늘은 이 헌터 지역을 방문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뉴캐슬에서는 차로 한시간 남짓 걸린답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한 컷 찍었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섰습니다. 집사람도 직접 차를 운전해서는 처음 가보는 곳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여러번 지도를 점검해야 했습니다. 호주 사람들은 지도 보기가 생활화되어 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지역의 상세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도들은 아무리 작은 길이라도 모두 표시되어 있고 모든 길에는 이름이 붙혀져 있습니다. 또한 실제 도로 상에도 모든 길에 그 도로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붙혀 놨기 때문에 정확한 주소와 지도만 있으면 누구라도 쉽게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침 식사는 집사람이 아침에 구워온 마늘빵과 음료수를 차 안에서 먹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차가 뉴캐슬 시가지를 벗어나자 호주의 시골 풍경이 펼쳐집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목초지에 드문드문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습니다. 우리의 목적지의 정확한 지명은 '세스낙'이란 곳인데 세스낙에 가까워 오자 포도 농장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스낙 중심가를 통과해서 목적지로 가는 주변은 온통 포도 농원들입니다.

아침에 서둘러서 나온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골프를 치기 위해서입니다. 이 헌터 밸리에도 골프장이 많이 있는데, 특히 호주의 골프 영웅, '그랙 노먼'이 직접 설계한 '빈티지'라는 골프 클럽이 바로 몇 주 전인 1월 5일 개장했다고 합니다. 애들도 갤러리로 같이 라운딩을 할 수 있다고 하니 헌터 밸리를 방문하는 김에 온 가족이 골프장에 한 번 가기로 한 것이지요. 골프장을 개장한 지 얼마 안되어서인지 골프장으로 향하는 도로가 아직 포장이 좀 덜 되 있습니다. '이 길이 맞나?'라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는데, 계속 전진을 하니 드디어 입구가 보이고 클럽 하우스도 보입니다. 금방 개장한 골프장답게 클럽 하우스는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락커룸에 들어 갔더니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락커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입구에서 가장 가깝고 쓰기 좋은 위치에 있는 락커 하나에는 번호가 적혀져 있지 않고 'Greg Norman'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골프 코스의 설계자인 그랙 노먼의 전용 락커인 모양입니다.

클럽 렌탈을 비롯한 모든 사무 처리를 하고 스코어 카드와 A4 용지에 인쇄된 코스 안내도를 받아 들고 나왔습니다. 이 클럽의 카트는 모두 2인승이라서 우리 애들과 모두 같이 타기 위해 2대의 카트를 빌려야 했습니다. 이 골프 코스는 현대적인 개념의 골프 코스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대부분의 홀이 티잉 그라운드에서부터 70-100m정도는 전혀 가꾸지 않은 러프로 되어 있어 공이 떨어지면 찾기 조차 힘듭니다. 페어웨이는 양탄자처럼 잘 가꾸어져 있지만 앞으로 반듯하게 설계된 경우가 거의없고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되어 있습니다. 도그래그의 형태로 되든지 아니면 그린 앞에서 큰 마운드나 워터 헤저드, 잘록한 모양의 좁은 페어웨이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린 주위의 공간은 70%이상의 공간을 벙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벙커 턱도 매우 높습니다. 정확한 벙커샷이 아니면 탈출이 힘듭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랙 노먼의 골프장 설계의 가장 큰 특징이 그린 주위에 많은 벙커를 배치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경치는 그림같은데, 코스는 무척 까다롭습니다.

골프 코스 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앞팀이 5명으로 구성된 팀이라 진행이 느려서 사진 찍을 시간도 충분하더군요. 골프 코스 너머로는 푸른 포도 재배 농장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코스가 조성되어 있으니 스코어는 크게 좋을리 없습니다. 특히 아내는 그린 주위의 벙커에 한 번 들어가면 거의 3-4번 만에야 탈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과 관계없이 일가족이 처음으로 골프 코스에 나오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두 대의 카트에 부자, 모자가 나눠 타고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카트를 모는 기분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몇 홀을 지나자 애들이 카트를 몰아보고 싶어 합니다. 페어웨이가 워낙 넓고 사고날 염려가 없어서 한 번 맡겨 봤더니 처음인데도 잘 몹니다. 아마 놀이 시설에서 범퍼카를 자주 볼아본 경험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조금 지나자 이제는 아예 두녀석 다 운전수가 되어서 엄마, 아빠에겐 운전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범퍼카와는 비교도 안되게 재미있다고 야단들입니다. 저희는 혹시 지겨워 할까봐 걱정했었는데 참 다행입니다. 골프 게임을 하기 보다는 일가족이 소풍을 나온 기분으로 18홀 경기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경기 도중 자그마한 사고가 났습니다. 16번 홀에서 티샷을 한 저의 공이 약간 우측으로 밀리면서 우측에 있는 페어웨이 벙커에 공이 떨어졌습니다. 앞 조가 홀 아웃하기를 기다렸다가 5번 아이언으로 벙커샷을 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약간 슬라이스가 나더군요. 벙커 턱이 높아서 앞쪽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누가 소리를 칩니다. 제가 친 공이 홀아웃을 하고 다음 홀로 이동하던 앞조의 플레이어에 맞았던 겁니다. 달려가 봤더니 다행히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고 본인도 괜찮다고 합니다. 걱정이 되서 몇 번이나 물어봐도 괜찮다고 하네요. 참 다행입니다. 까딱했으면 복잡한 문제가 생길 뻔 했습니다.

어쨌거나 일가족이 피크닉 온 기분으로 게임을 모두 끝냈는데 아이들은 아직까지 아쉬운 눈치입니다.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었는데 클럽하우스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테라스에서 호주식의 샌드위치 비슷한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와인의 고장이라 샴페인을 한 잔 마셨는데, 갈증이 나서인지 몰라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국에서 칵테일 파티등 모임에서 터뜨린 샴페인을 나눠 마시는 것 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다음 목적지는 포도주 시음장입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와인 농장을 몇군데 직접 방문해 볼 수도 있겠으나 벌써 오후 2시가 되었으므로(이 곳은 오후 5시면 모든 업무가 끝납니다.) 여러 가지 와인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시음과 판매를 함께 하는 매장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 곳에는 와인 매장 뿐만 아니라 이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치즈를 시식, 구입할 수 있는 가게, 특산물, 기념품을 파는 가게, 화랑, 커피점, 아이스크림점, 식당, 화랑 등이 한꺼번에 모여 있었는데, 와인 전시장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선 가까이 있는 가게들을 한 번 둘러 보았습니다.

호주의 유명한 사진 작가 중에 '던'이라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사람의 사진 전시회가 마침 화랑에서 열리고 있어서 구경을 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인접한 가게에서 여러 가지 특산물 구경도 하고 기념으로 장식용 초도 하나 샀습니다. 옆으로 돌아가니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치듯 또 온 식구가 하나씩 사 먹었습니다. 호주 체류 기간동안 제일 자주 먹은 단일 메뉴는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제가 호주 있는 동안 애들 체중 더 늘 것이 확실합니다.

포도주 시음장은 거대한 포도주 저장 창고의 한 켠을 전시실겸 시음장, 판매장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 상가들과는 좀 떨어진 숲 속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서늘한 기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듯). 판매원들이 방문객들에게 여러 가지 포도주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작은 잔에 술을 따라서 시음도 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포도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설명을 듣고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되었는데, 포도주의 맛은 그 깊이에 따라 크게 'heavy', 'medium', 'light'로 나누더군요. 이 맛의 차이는 술의 원료가 되는 포도의 품종에 의해 결정이 된답니다. '쉬라즈'라는 품종으로 만든 포도주가 저의 입맛에 맞았는데 미디엄 정도의 깊이를 가진 포도주입니다. 이걸로 두병 구입했습니다.

포도주 시음장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시음대에서 수많은 종류의 포도주를 맛 볼 수 있습니다. 주당들은 여기서 얼큰하게 취해서 나가기도 한다는 군요. 오른쪽에는 여러 가지 포도주들을 전시해 두었고 그 안쪽은 포도주를 담은 오크통들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입니다. 이 창고의 한 쪽은 치즈 저장고로 사용되고 있어서 포도주 시음소의 옆 쪽에는 치즈를 시식,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포도주 시음장 바로 옆은 치즈 전시, 판매장입니다. 역시 치즈 생산 창고와 연결이 되어 있었고 치즈 생산하는 과정을 유리창을 통해 살펴 볼 수 있게도 해 두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치즈를 맛 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많이 먹던 치즈보다 풍미가 강해서 우리 입맛에는 잘 맛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향이 덜 강한 놈으로 하나 샀습니다.

이렇게 둘러보다보니 벌써 오후 5시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참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많이 아픕니다. 마침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커피점이있어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다리를 좀 쉬었습니다.

와인 시음장을 중심으로 식당, 카페, 화랑, 기념품 상회, 제과점 등이 모여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호주, 특히 뉴캐슬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무척이나 친절하고 느긋하다는 것입니다. 고급 호텔이나 고급 상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교육에 의한 사무적인 친절이 아니고 이네들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몸에 밴 자연스러운 친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기분좋게 해 주는 이런 친절과 웃는 인상들, 과장될 정도로 연발하는 'Thank you', 'I'm sorry'등의 말들은 우리들도 분명 본받을 만 합니다. 또한 이네들은 매사를 서두르는 법이 없고 줄서고, 기다리는데 대한 인내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아무리 자리가 텅 비어 있어도 자리를 안내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복잡한 주문을 하는 사람 뒤에서 콜라 한병 사기 위해 5분을 기다려도 '이것 먼저 계산하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습니다. 뒤에 아무리 순서가 밀려있어도 느긋하게, 서두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이에 대해 어느 누구하나 조급증을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느긋해서 처음 이 나라에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통 터지는 일도 다반사라고 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1차 산업 위주(양모, 철광석, 석탄 등)의 산업 구조를 가지면서도,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나라, 좋은 근로 조건(9시에서 5까지의 근무 시간이 확실하며 주 5일 근무 원칙이지만 실제로는 3,4일밖에 근무 안한답니다.), 좋은 기후, 넓은 국토, 거기에 매장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지하자원, 낮은 인구 밀도, 저렴한 생필품, 저렴한 교육비, 잘 정비된 사회 보장 제도 등의 여러 가지 여건들이 이네들로 하여금 경쟁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자식 교육, 주택 구입, 노후 보장을 위한 저축, 이 세가지가 우리 나라 중,장년 층의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가진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생활이 여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친절하고 느긋한 국민성은 억지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생활의 여건들이 갖추어 질 때 저절로 함양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말이 약간 옆길로 샜네요.

돌아오는 길은 길이 익숙해서인지 한 시간이 채 안되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앞에 차를 세우고 있는데 피터 할아버지와 조이 할머니가 외출했다 돌아오시면서 인사를 합니다. 할아버지는 맨발로 다니는 걸 즐기시는데 오늘도 역시 맨발입니다. 할아버지와 윤섭이는 죽이 척척 맞습니다. 둘이서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바디 랭귀지를 나누다 결국 조이 할머니에게 핀잔을 듣습니다. 그러는 사이 언제 나타나셨는지 앞집의 프랭크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인사를 하십니다. 안그래도 어제 저녁에 찾아뵐려고 했었는데 늦어서 못 찾아뵜다고 했더니 지금 당신 집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애들을 우리집으로 들여 보내고 바로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집은 타운 하우스가 아니고 호주의 일반적인 단독 주택입니다. 집안의 구조가 조금 특이했는데 알고 봤더니 몇 년 전, 지금의 집을 사서 이사올 때, 집이 너무 좁아서 뒤쪽의 벽을 허물고 거실과 부엌, 목욕탕을 새로 만드는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좁았을 실내가 뒤 쪽에 부엌과 거실이 널찍하게 자리 잡은 구조로 변해 있습니다.

프랭크 할아버지는 현직에서 은퇴한 분이신데 손자와 손녀가 자그마치 11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손자, 손녀의 얼굴이 담긴 액자 11개를 가지런히 배열해 놓았더군요. 이 분들 역시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하신 분들입니다. 피터 할아버지와 더불어 우리 식구들을 당신의 가족인양 물심양면으로 늘 도와주시는 고마운 이웃들입니다. 이 집에는 비디오 테입이 많은데 우리 아이들의 비디오 대여소 비슷한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집 애들은 이 집의 뜰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이 집의 손자들이 놀러 오면 우리집 애들과 좋은 친구가 된다고 합니다.

프랭크 할아버지의 풀네임은 '프랭크 시나트라'라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가수와 이름이 같습니다. 매우 유쾌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신데 알고 봤더니 이탈리이 분으로 50여년 전에 호주로 이민을 오신 분입니다(프랭크 시타트라도 이태리인이죠?). 그러고 보니 가무잡잡한 피부, 짙고 검은 눈썹, 우뚝한 코 등, 이탈리아 사람의 용모가 숨어 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 역시 이탈리아인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 한국 월드컵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잘 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 이후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당시 판정에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심판의 문제이지 한국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잉글랜드 계열의 앵글로 색슨 족이 아닌 이탈리아 이민으로서 어려운 점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이민올 당시에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nism)로 해서 애를 좀 먹었다고 합니다. 호주의 백호주의는 호주 영연방으로 탄생하던 1901년 채택되어 1973년 공식 철폐될 때까지 70여년 간 지속되었는데, 모든 정책에 있어 백인종, 특히 영국으로부터의 이민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세계의 딴 나라들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악법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법입니다. 이 시기에 영국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은 정부로부터 땅도 무상으로 제공받는 등 여러 가지의 지원을 받았지만 딴 나라들에서 온 이민자들은 비록 백인이라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 프랭크 할아버지도 18세의 소년기에 이 땅에 와서 초기 정착 단계에서는 제법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호주의가 철폐되고 다문화 국가를 천명하면서 이민의 문호를 활짝 연 오늘날의 호주에서는 이런 백호주의의 잔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이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백인이 아니라고해서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20년 이상 살아온 교포의 말이니 정말 그렇다고 봐야겠죠?

프랭크 할아버지는 맥주를 내 놓고 한 잔 하라고 권하십니다. 낮에 주섬주섬 먹은 게 많아서 한 잔 먹고는 배가 불러 못먹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위스키를 꺼내 놓고 또 권하십니다. 술을 일부러 권하지 않는게 서양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프랭크 할아버지는 다릅니다. 이탈리아인이라서 그런가요? 위스키를 몇 잔 마셨더니 얼큰하게 취기가 오릅니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자기 창고 구경시켜 주겠답니다. 창고는 사방에 각종 공구가 빽빽하게 걸려 있는 공방입니다. 호주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다 공구를 완비해 놓고 왠만한 집안 수리는 손수 다 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창고도 예외는 아니더군요. 한 쪽 옆에는 각종 낚시 도구도 즐비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차고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사슴 뿔과 사슴 박제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들은 예전에 할아버지가 키우던 사슴에서 채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은퇴하기 전에는 사슴 농장을 경영했었는데 모두 이 때 만든 것들이라고 합니다. 사슴 뿔은 이 사람들도 정력에 좋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Good to Sexy'라고 합니다. 녹용이 좋긴 좋은 모양입니다.

두사람이 워낙 쾌활하고 사교성이 있는 분들이어서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벌써 어두워 진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입니다. 할아버지 집에서 얻어온 파스타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늘이 뉴캐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입니다. 내일은 골드 코스트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거기서 이틀 보낸 후 시드니로 다시 이동해서 이틀을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 저녁 모든 짐들을 꾸려두어야 합니다. 집사람은 세탁해 두었던 빨래들을 챙기고 골드코스트와 시드니로의 여행 준비에 바쁩니다. 저는 제 짐을 아내는 자신과 애들의 여행 물품들을 챙깁니다.

호주를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와 애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기분에 집안을 다시 한 번 구석구석 살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