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가족들이 쓴 글들을 모아둔 곳입니다.

 로그인

할머니와 나
BOF  2009-10-07 15:07:35, 조회 : 2,217, 추천 : 342

모두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저는 추석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차례 3군데, 어른 방문 2군데, 성묘 1군데 다녀오느라 고생 깨나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보름달이 휘어청한 저녁이 되었더군요.

작년에 낙상으로 인한 고관절 골절로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 동안 기력을 많이 회복한 듯했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보행을 하실 정도로 좋아졌더군요. 작년에 골절을 당하셨을 때 96세의 고령이라는 점 때문에 수술을 많이 망설였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수술을 강행했고 다행히도 할머니는 수술을 꿋꿋하게 견뎌내셨고 이제는 많이 회복되셨더군요.

그러나 육체적인 회복과 달리 기억력은 너무나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받으실 때만 해도 제가 '아무개'라고 이야기 하면 '아 그래 니가 **구나' 하시면서 반가워 하시고 제 손을 꼭 잡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병원이 내 손자 **가 근무하던 병원이다'라고 하도 자랑을 하셔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제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가 '할머니! **예요.'하고 말씀드리면 '아 그래? **가? 나는 이제 누구라고 이야기 안하면 모르겠다' 하시고는
조금 있다 제가 화장실 다녀오니 '넌 누고?'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이름을 가르쳐 드리면 '그래 **구나...'.
그리고 또 조금 있다 물어 보면 또 저를 기억 못하시는 겁니다.

옆에 계시던 숙부님께서 답답하신지 '그럼 저는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고 물으니 '안가르쳐 주는데 내가 우찌 아노?'하십니다. 아들도 기억을 못하시는게지요.

큰놈을 불러서 '할머니 ** 아들 형섭이예요.'하고 인사를 시키니, '아! 형섭이가?' 하시면서 반가워 하십니다.
형섭이는 태어나서 몇 년을 할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기억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어른 덩치만큼 커진 증손자를 낯설어 하면서도 주섬주섬 지갑을 뒤져서 만원짜리 한 장을 건냅니다.
그러나 잠시후 또다시 형섭이를 쳐다보고는 '너는 누고?', 가르쳐 드리면, '돈 한 푼 줄까?'를 되풀이 하시더군요.
제 이름 묻는 것과 형섭이 용돈 준다는 말씀을 한 10번 이상 한 것 같습니다. 딴 식구들도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하셨구요.

처음엔 짠한 마음이 들었는데 워낙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되풀이 되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네요.

거의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할머니와는 감정이 오고가는 대화는 나누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시긴 하지만 의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관계는 끝난 것이니 앞으로의 삶은 어찌보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년 전 호주로의 여름 휴가를 다녀오던 날 인천 공항에 내리자말자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며칠 사이에 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인천에서 대구까지 울면서 내려왔습니다.
평소 90대 중반까지 사셨으니(당시 연세 93세) 돌아가신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할머니를 보낸다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그런데 대구에 내려가서 할머니를 직접 뵈고 세심하게 살펴보니 - 특별한 병은 아니고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져서 그런 것이니 치료법이 없고 초상치를 준비하라던 인근 개인 의원 원장님의 말씀과는 달리 - 미열이 살짝 있는 것이 어딘가 감염이 있는 소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응급실로 모시고 가서 검사를 해 보니 급성 신우신염이었습니다.
워낙 고령이다보니 신우신염의 특징적 증상을 보이지 않아서 진단이 제대로 안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입원 후 적절한 항생제를 쓰고 바로 좋아지셨습니다.

그 후 3년간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작년에 가볍게 넘어진 것이 고관절 골절로 이어지는 바람에 제법 큰 수술을 받으셨죠.
다행스럽게도 수술을 잘 견디시고 이제 체력도 많이 회복이 되셨지만 이젠 단기 기억력이 너무나 떨어지셨네요.

4년 전에는 할머니를 보내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더니 이젠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아마도 이젠 할머니와 정상적인 감정의 교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때문이겠죠.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크나큰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또한 느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가들고 몇 년 후까지, 거의 30년 이상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터이고, 또 옛날 어른들이 의례 그렇듯 맏손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할머니라 당신의 그늘은 예상 외로 크고 짙습니다.

어린 시절 여름날 모깃불을 피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앉아 풋고추와 된장으로 저녁을 먹던 기억도,
밤새 잠을 설치시면서 부채로 모기를 쫓아주던 기억도,
시험 공부 하느라 새벽에 일어나 꾸벅꾸벅 조는 손자를 끊임없이 깨워주던 기억도,
처음 차를 산 뒤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 갔을 때 기뻐하시던 기억도,
손주 며느리, 증손자 보시고 '내가 오래 사니 이런 날도 있구나'하시던 기억도 이젠 모두 저 혼자만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꺼져가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이런 추억들도 모두 놓쳐버리시겠죠.

그렇지만 그런 즐거운 추억과 함께 30대 중반에 남편을 잃은 일, 60대 중반에 큰 아들(제 선친입니다)과 큰 사위를 잃은 아픈 기억들도 같이 매몰되어 갈 테니, 이제는 세상의 희노애락을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마음 속에는 고요한 평화만이 남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할머니를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15  아들 군대 보내기 -- 3편 어학병    BOF 2011/07/18 210 18162
314  형섭이가 진학할 대학이 결정되었습니다.    BOF 2010/04/23 235 16954
313  The Great Aussie Bush Camp - Second Day    노형섭 2003/12/19 94 15567
312  아들 군대 보내기 -- 1편 군 입대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들    BOF 2011/07/18 129 12743
311  오궁 가족 답사기 - 경복궁(1)    BOF 2004/12/14 66 8506
310  달력 이야기    BOF 2002/11/07 131 7311
309  민사고 입학식 참관기  [3]  BOF 2007/03/06 181 6357
308  코타키나발루 여행기(2)  [2]  BOF 2009/09/02 214 4952
307  아들과 함께 한 한라산 등반기    BOF 2013/06/18 106 4782
306  민사고 학부모 간담회  [4]  BOF 2006/12/15 148 4735
305  형섭이 면회 다녀 왔습니다.    BOF 2011/09/29 127 4455
304  JSA 방문기(형섭이 면회기)  [1]  BOF 2011/11/02 127 4399
303  형섭이의 성년식  [1]  BOF 2009/05/20 208 3984
302  BOF의 합창단 동기 모임    BOF 2003/09/22 81 3811
301  아들 군대 보내기 -- 2편 카투사    BOF 2011/07/18 157 3536
300  아내의 생일 선물  [2]  BOF 2009/01/15 247 3465
299  춘분과 부활절    BOF 2012/03/20 143 3320
298  코타키나발루 여행기(1)    BOF 2009/09/01 187 3260
297  오궁 패밀리의 미국 여행기-1  [1]  BOF 2010/09/01 144 3047
296  주말 형섭이 학교 방문    BOF 2007/04/11 101 2966
295  오궁 패밀리의 미국 여행기-4    BOF 2010/09/11 151 2803
294  오궁 패밀리의 미국 여행기-2  [1]  BOF 2010/09/03 148 2679
293  형섭이의 첫 귀가  [1]  BOF 2007/03/27 121 2630
292  광양 매화 마을 꽃놀이  [1]  BOF 2008/04/17 222 2597
291  탈장이 뭘까?    BOF 2001/12/12 160 2591
290  집에서 만드는 스콘 레시피  [2]  BOF 2010/02/10 207 2573
289  늦겨울 소백의 눈 꽃    BOF 2012/03/08 71 2532
288  윤섭이의 2006 GLPS 여름 캠프    BOF 2006/12/15 107 2467
287  윤섭이와 함께한 주말  [1]  BOF 2009/02/16 291 2457
286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4) - 헌터벨리  [1]  BOF 2008/02/15 171 2410
285  오궁 패밀리의 미국 여행기-3    BOF 2010/09/09 130 2402
284  아들과 함께 한 차마고도 트레킹 - 수허고성, 리장고성    BOF 2014/09/05 83 2400
283  오궁 부부의 일본 여행기(2)  [2]  BOF 2008/09/12 135 2299
282  오궁 가족의 1박 2일  [1]  BOF 2009/08/04 215 2272
281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BOF 2003/05/24 121 2254
280  초보자를 위한 사진 촬영 팁 (1)    BOF 2011/07/20 104 2248
279  형섭이 근황    BOF 2010/10/18 160 2220
 할머니와 나    BOF 2009/10/07 342 2217
277  아들과 함께 한 차마고도 트레킹 - 호도협 둘째날    BOF 2014/08/30 89 2197
276  주왕산과 주산지의 끝물 단풍    BOF 2009/11/12 160 2171
275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6) - 시드니 관광  [2]  BOF 2008/02/16 170 2152
274  윤섭이의 짧은 방학  [1]  BOF 2010/08/12 168 2149
273  최고의 뮤직 에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    BOF 2002/07/02 84 2148
272  존댓말 유감    BOF 2010/07/08 207 2138
271  고생 많이 한 미국 여행  [1]  BOF 2010/09/01 186 2135
270  형섭이 학교 풋볼 개막전 사진    BOF 2010/09/15 131 2127
269  글로리아 에스테판 - Live in Atlantis    BOF 2003/05/24 72 2111
268  골프 핸디캡 산정 방법 (1)    BOF 2002/05/20 100 2073
267  DTS demontration DVD #7    BOF 2003/05/24 79 2058
266  4자성어로 풀어본 17기 동기모임    BOF 2005/09/07 90 2041
265  부석사의 소국(小菊)    BOF 2008/11/17 172 2011
264  크로스 오버의 모범 - 파바로티와 친구들    BOF 2002/07/16 75 1960
263  앙코르 유적군 여행기(2) -- 타프롬, 바이욘, 반테스레이  [1]  BOF 2012/02/11 68 1953
262  제임스 이야기    BOF 2009/01/13 141 1948
261  형섭이와 기타  [2]  BOF 2007/01/05 153 1924
260  Yankee Stadium에서 Football을?    BOF 2010/11/22 151 1909
259  골프 핸디캡 산정 방법 (4)    BOF 2002/05/20 99 1887
258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5) - 헌터벨리,뉴카슬  [1]  BOF 2008/02/16 146 1873
257  홋카이도 여름 휴가 - 오타루    BOF 2012/09/10 89 1866
256  3테너 로마 공연    BOF 2001/12/12 272 1861
255  형섭이 군대 갔습니다.    BOF 2011/09/29 93 1859
254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3) - 포트 스티븐스    BOF 2008/02/15 124 1859
253  형섭이의 귀국    BOF 2011/01/18 135 1847
252  바하 - 미사 b 단조    BOF 2003/09/05 140 1845
251  하늘로 올라간 천상의 목소리    BOF 2007/09/07 199 1835
250    전국 골프장 course rating 현황    BOF 2003/03/07 76 1803
249  형섭이의 봄방학    BOF 2011/03/21 129 1802
248  눈이 왔네요 - 요즘 오궁 가족 소식    BOF 2006/11/07 166 1785
247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1) - 출발  [1]  BOF 2008/02/12 127 1785
246  오궁 부부의 일본 여행기(1)  [2]  BOF 2008/09/11 130 1773
245  Pavarotti 절정기의 목소리 - Gala Concert    BOF 2002/07/27 89 1765
244  군산 기행 - 근대 문화 유산을 찾아서...    BOF 2014/08/07 73 1760
243  한라산 가족 등반(1)  [1]  BOF 2013/02/19 83 1742
242  군바리의 관심은?  [1]  BOF 2012/05/04 95 1740
241  오궁 패밀리의 홍콩 여행기 (3)  [1]  BOF 2007/01/05 106 1739
240  초보자를 위한 사진 촬영 팁 (4)    BOF 2011/07/20 106 1737
239  영주의 벚꽃    BOF 2008/04/21 146 1737
238  오궁 가족 답사기 - 하회 마을    BOF 2004/05/03 89 1737
237  소백산에서 만난 야생화    BOF 2012/07/04 98 1727
236  Images of Notre Dame  [2]  BOF 2011/02/10 122 1723
235  오궁 가족 답사기 -- 소수 서원  [1]  BOF 2004/03/31 115 1721
234  엘튼 존(Elton John)-One Night Only-The Greatest Hit    BOF 2003/05/24 183 1710
233  첨성대 야경    BOF 2007/04/24 100 1705
232  늦게 올리는 여름 휴가 사진 여행기(2) - 뉴카슬 주변 배회하기  [2]  BOF 2008/02/13 133 1687
231  태그 강좌(8) - 테이블 태그    BOF 2005/01/17 129 1683
230  안구 경기?    BOF 2012/03/27 96 1676
229  이 한 장의 사진!!  [1]  BOF 2012/04/17 91 1659
228  뱀사골-피아골 단풍 산행    BOF 2013/11/16 75 1650
227  피묻은 다이아몬드    BOF 2002/04/04 55 1649
226  형섭이가 보낸 '손글씨 부모님 전상서'    BOF 2011/04/29 122 1640
225  가을 사진 몇 장 더...    BOF 2007/11/27 114 1629
224  아들과 함께 한 차마고도 트레킹 - 호도협 첫째날    BOF 2014/08/30 85 1626
223  화장실 들어갈 때 맘과 나올 때 맘이 다르다? ^^    BOF 2011/09/29 85 1615
222  DIVA라 불리어 손색없는 女子들!!    BOF 2002/03/19 319 1608
221  가을이 깊어가는 부석사    BOF 2007/11/26 125 1605
220  John's Tasmania Tour (3)    노형섭 2003/12/05 78 1604
219  여름 부석사, 그 넉넉함으로...    BOF 2007/06/25 101 1603
218  아들과 함께 한 차마고도 트레킹 - 마지막 날 무후사, 마무으리!    BOF 2014/09/05 83 1601
217  태그 강좌(7) - HTML 문서와 기본 태그    BOF 2005/01/17 76 1577
216  필리핀 휴가기    BOF 2002/08/27 103 1575

    목록보기   다음페이지 1 [2][3][4]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