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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
BOF  2009-10-07 15:07:35, 조회 : 2,267, 추천 : 346

모두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저는 추석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차례 3군데, 어른 방문 2군데, 성묘 1군데 다녀오느라 고생 깨나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보름달이 휘어청한 저녁이 되었더군요.

작년에 낙상으로 인한 고관절 골절로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 동안 기력을 많이 회복한 듯했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보행을 하실 정도로 좋아졌더군요. 작년에 골절을 당하셨을 때 96세의 고령이라는 점 때문에 수술을 많이 망설였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수술을 강행했고 다행히도 할머니는 수술을 꿋꿋하게 견뎌내셨고 이제는 많이 회복되셨더군요.

그러나 육체적인 회복과 달리 기억력은 너무나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받으실 때만 해도 제가 '아무개'라고 이야기 하면 '아 그래 니가 **구나' 하시면서 반가워 하시고 제 손을 꼭 잡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병원이 내 손자 **가 근무하던 병원이다'라고 하도 자랑을 하셔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제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가 '할머니! **예요.'하고 말씀드리면 '아 그래? **가? 나는 이제 누구라고 이야기 안하면 모르겠다' 하시고는
조금 있다 제가 화장실 다녀오니 '넌 누고?'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이름을 가르쳐 드리면 '그래 **구나...'.
그리고 또 조금 있다 물어 보면 또 저를 기억 못하시는 겁니다.

옆에 계시던 숙부님께서 답답하신지 '그럼 저는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고 물으니 '안가르쳐 주는데 내가 우찌 아노?'하십니다. 아들도 기억을 못하시는게지요.

큰놈을 불러서 '할머니 ** 아들 형섭이예요.'하고 인사를 시키니, '아! 형섭이가?' 하시면서 반가워 하십니다.
형섭이는 태어나서 몇 년을 할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기억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어른 덩치만큼 커진 증손자를 낯설어 하면서도 주섬주섬 지갑을 뒤져서 만원짜리 한 장을 건냅니다.
그러나 잠시후 또다시 형섭이를 쳐다보고는 '너는 누고?', 가르쳐 드리면, '돈 한 푼 줄까?'를 되풀이 하시더군요.
제 이름 묻는 것과 형섭이 용돈 준다는 말씀을 한 10번 이상 한 것 같습니다. 딴 식구들도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하셨구요.

처음엔 짠한 마음이 들었는데 워낙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되풀이 되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네요.

거의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할머니와는 감정이 오고가는 대화는 나누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시긴 하지만 의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관계는 끝난 것이니 앞으로의 삶은 어찌보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년 전 호주로의 여름 휴가를 다녀오던 날 인천 공항에 내리자말자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며칠 사이에 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인천에서 대구까지 울면서 내려왔습니다.
평소 90대 중반까지 사셨으니(당시 연세 93세) 돌아가신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할머니를 보낸다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그런데 대구에 내려가서 할머니를 직접 뵈고 세심하게 살펴보니 - 특별한 병은 아니고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져서 그런 것이니 치료법이 없고 초상치를 준비하라던 인근 개인 의원 원장님의 말씀과는 달리 - 미열이 살짝 있는 것이 어딘가 감염이 있는 소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응급실로 모시고 가서 검사를 해 보니 급성 신우신염이었습니다.
워낙 고령이다보니 신우신염의 특징적 증상을 보이지 않아서 진단이 제대로 안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입원 후 적절한 항생제를 쓰고 바로 좋아지셨습니다.

그 후 3년간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작년에 가볍게 넘어진 것이 고관절 골절로 이어지는 바람에 제법 큰 수술을 받으셨죠.
다행스럽게도 수술을 잘 견디시고 이제 체력도 많이 회복이 되셨지만 이젠 단기 기억력이 너무나 떨어지셨네요.

4년 전에는 할머니를 보내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더니 이젠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아마도 이젠 할머니와 정상적인 감정의 교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때문이겠죠.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크나큰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또한 느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가들고 몇 년 후까지, 거의 30년 이상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터이고, 또 옛날 어른들이 의례 그렇듯 맏손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할머니라 당신의 그늘은 예상 외로 크고 짙습니다.

어린 시절 여름날 모깃불을 피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앉아 풋고추와 된장으로 저녁을 먹던 기억도,
밤새 잠을 설치시면서 부채로 모기를 쫓아주던 기억도,
시험 공부 하느라 새벽에 일어나 꾸벅꾸벅 조는 손자를 끊임없이 깨워주던 기억도,
처음 차를 산 뒤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 갔을 때 기뻐하시던 기억도,
손주 며느리, 증손자 보시고 '내가 오래 사니 이런 날도 있구나'하시던 기억도 이젠 모두 저 혼자만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꺼져가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이런 추억들도 모두 놓쳐버리시겠죠.

그렇지만 그런 즐거운 추억과 함께 30대 중반에 남편을 잃은 일, 60대 중반에 큰 아들(제 선친입니다)과 큰 사위를 잃은 아픈 기억들도 같이 매몰되어 갈 테니, 이제는 세상의 희노애락을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마음 속에는 고요한 평화만이 남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할머니를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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