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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 유감
BOF  2010-07-08 11:23:22, 조회 : 2,135, 추천 : 207

제가 중학교 들어가서 영어를 처음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무슨 과목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선생님께서 수업 도중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희들이 요즘 배우는 영어는 말이야... 존댓말이 없어. 상놈 말이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계층별로 엄격한 존댓말이 있는 우리말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크게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그러고 보니 영화를 통해 보는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의 모습은 존댓말 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예법에서도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무례한 경우가 많고 윗 사람에게 불경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연히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아서 비록 우리가 그네들보다 산업화가 덜 되고 소득 수준은 낮을 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존댓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이후 성년이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저의 의식 근저에 깔려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애들과 아내가 호주에 있을 때였습니다. 아내가 석사 학위를 위해 호주에 있을 때 저희집 맞은 편에는 '프랭크'라는 이름의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이차 대전이 끝난 직후 호주로 이민 온 이태리 사람인데 호주인 아내를 맞아 농장을 일구어 자수성가를 하셨고 이젠 은퇴하여 저희집 맞은편에 살고 계셨는데, 이태리 사람답게 매우 다정다감하여 저희 식구를 딸, 손자처럼 잘 보살펴 주셨습니다. 특히 손재주가 좋으셔서 고장난 물건은 무엇이든 못고치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집 물건이 고장나면 늘 이분이 손을 봐 주셨는데 하루는 아내의 차가 살짝 고장이 난 모양입니다. 카 센터로 가려고 이 분께 카 센터 위치를 여쭤 봤더니 자신이 한 번 고쳐 보겠다 하시면서 시작을 하셨는데 맘처럼 잘 안되었는지 하루종일 차를 붙들고 끙끙대시더랍니다. 한 나절이 지난 뒤에 고치긴 하셨는데 온 몸이 땀과 기름 범벅이 되셨답니다. 아내가 너무 미안해서 - 딴 때는 그냥 고맙다고 인사만 했는데 이날은 뭐라도 사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 말을 꺼냈더니 이분께서 펄쩍 뛰시면서 'What's friend for?'라고 하시더랍니다. 우리말로 하면 '친구 좋다는게 뭐냐?'일텐데, 이 말을 하시면서 사례를 극구 사양하시더랍니다.

이 일화를 전해들은 저는 약간의 문화적 충격을 느꼈습니다. 70이 가까운 노인과 30대의 젊은이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저도 호주의 가족을 방문할 때마다 이 집으로 초청을 받아서 이태리식 만찬을 대접받았고, 그들이 경영했었고 지금은 그의 처남이 경영하고 있는 목장도 방문해서 즐거운 한 때도 보내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이 분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친근한 친구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이죠. 물론 우리나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챙겨주고 보살펴 주는 미덕은 있습니다만 이들처럼 친구로 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무엇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까요?
여러가지 문화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이네들의 존댓말을 쓰지 않는 문화가 이들의 세대를 뛰어넘는 친구 문화에 큰 기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손자가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존댓말을 쓰지 않으니 나이 차이가 많아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단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나이, 사회적 지위 등을 파악해서 어느 정도의 존칭을 써야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존댓말은 말하는 태도나 용어의 선택에 따라서 같은 존댓말이라도 반존대부터 시작해서 극존대까지 천차만별입니다. 존대의 정도에 따라서 상하 관계가 저절로 설정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엄격한 존댓말이 있는 한 세대를 뛰어 넘는 친구 사이는 왠만해서는 구축하기 힘들겁니다.

그러면 이런 반문을 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꼭 계층을 뛰어 넘어 친구 사이가 될 필요가 있을까?'
맞습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요. 오히려 군대처럼 엄격한 위계 질서가 있어야 제대로 잘 돌아가는 조직도 있을테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문화가 더 바람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예전의 우리와 같은 농경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화가 더 적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몰라도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이런 문화는 약간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다시피 요즘은 그로벌 시대이고 정보의 소통이 너무나 빠른 사회이며, 조직 내의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서 막힘없는 소통이 중요시 되는 사회입니다. 70-80년대 그렇게 잘 나가던 일본이 요즘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연공서열에 기반을 둔 직장 내의 경직된 조직 문화가 그 원인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거대 기업들의 실패 원인을 보면 예외없이 조직 내에서의 소통 부족과 경영진의 경직된 사고 방식이 꼽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직내, 계층간, 세대간의 소통이 날이 갈수록 강조되는 시대에는 예전에는 아름다운 미덕으로 작용했던 존댓말의 문화가 이젠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저만의 억척일까요?

정년 퇴직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는 정년 퇴직이 따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능력만 되고 체력만 된다면 나이가 들어도 얼마든지 근무할 수 있고 반대로 나이가 젊어도 능력이 안되면 언제든지 물러나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년을 채우기는 커녕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존댓말 문화에서도 일정 부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직급에 관계 없이 존댓말을 써야 하고 나이 대접을 해 줘야 하니 상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이든 사람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자신보다 젊은 상급자기 생길 형편이 되면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을 하게 되는 것죠. 검찰 조직 등을 보면 자신보다 젊은 기수에서 청장이 나오면 그 동기나 선배들은 모두 옷을 벗는 문화가 있는데(새 청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용퇴라고 하면서 미덕으로 치더군요.) 미국같은 나라에서도 이런 것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미덕(?) 때문에 유능한 인재를 놓치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온 국민이 저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해도 오랜 문화 속에서 DNA 깊이 각인된 우리의 존댓말 문화를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저만 해도 저희집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부모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쓰고 있고, 요즘도 조금만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저의 눈꼬리가 올라갑니다. 그저 어쩔 수는 없지만 우리의 존댓말 문화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여러모로 장애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잡설을 늘어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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