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들이 가기 전에 설악산과 지리산을 꼭 찾고 싶었지만
설악산은 9월말과 10월 초, 두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매번 비가 오는 바람에 팀이 취소 되었고
10월 하순으로 넘어오면서 지리산이라도 제때 가고 싶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아
지리산 단풍이 끝물에 이른 지난 주에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가이드 산악회를 따라 나선 길.
대구까지 차를 몰고 가서 24시간 영업을 하는 버거킹에서 점심 식사용 더블 와퍼를 하나 사서
시간에 맞춰 도착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달려 아침 식사를 위해 내린 거창 휴게소.
뒷편으로 단풍이 곱습니다.
이곳도 단풍이 기슭까지 내려온 걸 보니 지리산 단풍은
초입에서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면 감지덕지일 것 같습니다.



오늘의 코스는 뱀사골에서 시작해서 화개재를 오른 뒤 삼도봉, 반야봉, 임걸령을 거쳐
피아골로 내려오는 단풍 산행입니다.
뱀사골 등산의 들입인 반선에서 차를 내리니 고운 단풍이 게으른 산객을 맞이합니다.



오늘이 11월 10일이니 벌써 11월 중순,
단풍이 기슭에라도 남아 있음이 다행입니다.



산행 들머리엔 예전의 차도 옆으로 계곡을 따라 새로운 길을 조성해 놨습니다.
당연히 계곡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계곡 중 하나라는 뱀사골.
들입부터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집니다.



'뱀사골'은 그 이름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옛날에 뱀사골 입구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선 칠월 백중날 신선대에 올라가 기도를 하면 신선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괴이하게 여긴 어느 대사가 신선대에 올라 기도를 하려는 스님의 가사장삼에
몰래 명주실과 독을 매달아 두었다고 합니다.
이날 새벽 괴성이 들렸는데 날이 밝은 뒤 찾아 보니 스님은 간 곳이 없고 
뱀소 부근에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 뱀이 죽었던 골짜기라고 해서 '뱀사골'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이무기에 죽어갔던 스님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뱀사골 입구 동네를
'반쯤 신선이 되었다'는 뜻으로 '반선(半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 때문인지 뱀사골 계곡엔 뱀, 용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습니다.



뱀사골-피아골 구간은 예전에 대학 시절 동아리 하계 수련회의 단골 코스였습니다.

오늘 산행은 단풍 감상의 목적도 있지만
대학 시절의 추억이 깃든 등산로를 30여 년만에 다시 찾는다는 의의도 큽니다.



그러나 역시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시간의 차이는 커서



계곡 어디를 둘러 봐도 예전의 기억은 흔적도 없네요.



계곡을 따라 새로 조성된 길을 2km 정도 걸으니 '오룡대'에 도착합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 보니 오룡대란 이름은 용이 승천하려고
목을 내밀고 몸부림 치던 형상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라고 하는데
눈썰미 부족한 산객은 뭐가뭔지 모르고 지나쳤고...



오룡대를 지나고 나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길은 평지와 다름없이 평탄한데
뱀사골 등반로는 화개재 아랫쪽의 간장소까지 이런 평탄한 길이 계속됩니다.



이곳은 '탁룡소'인데, 큰 뱀이 목욕을 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다 이곳 암반 위에 떨어져
100여 미터나 되는 자국이 생겼는데 그 자국 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탁룡소(濯龍沼)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셔터 속도를 좀 더 늦춰줘야 물줄기가 아름답게 나오는데
삼각대를 가져가지 않아서...
손각대의 한계입니다. ㅠㅠ



이 만큼만 올라와도 이미 단풍은 져 버려서



주변은 겨울 풍경을 방불케 하지만



30년 만에 찾은 아름다운 뱀사 계곡은 감동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나올 때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네요...



뱀사골은 골은 깊지만 경사도가 완만해서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경사가 완만한 데다 뱀사골의 고갯마루인 화개재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높이가 낮아서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역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완만한 경사는 그 옛날 이 길을 드나들던 소금 장수가
지고 가던 소금 가마니를 빠뜨려서 그 일대의 물맛이 짜졌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간장소까지 이어지니 들입부터 간장소까지의 6km 남짓되는 길은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어서 가족 등반로로도 적당합니다.



서서히 경사를 높여가다 보면 '제승대'를 만납니다.



이곳은 1,300년 전 이곳에 있었던 송림사란 절의 고승이었던 정진 스님이
불자들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해서 제를 올렸다고 해서
'제승대(祭僧臺)'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소금장수의 애환이 서려 있는 간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반선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6.2km이니 꽤 먼 거리이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고 주변 경관이 워낙 뛰어나서 힘든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진을 찍고 나서 큰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완충을 한 배터리를 아침에 끼웠는데
이 지점에서 카메라 배터리가 꺼져 버렸습니다.
이제 겨우 100컷 정도 찍었으니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카메라가 문제인건지 배터리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이 디카를 7년 정도 썼고 산에 가지고 다니느라 크고 작은 충격도 있어서
요즘 들어 여러 가지 자그마한 에러도 잦았는데
이제 바꿀 때가 됐다는 신호가 오는 것 같습니다.

자주 가는 코스라면 이런 사태가 나면 깨끗하게 사진을 포기하는데
오늘은 워낙 오랜만에 온 코스이고 또 언제 이 코스를 들를지 모르는 상황이니
사진을 포기할 수 없어 휴대폰 카메라를 써 보기로 합니다.



간장소를 지나니 경사도 가팔라지고 길도 조금 험해지지만 아주 급한 경사는 아닙니다.
화개재 바로 아래에 위치한 뱀사골 대피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막차'란 곳이 나오는데
이곳은 예전에 이곳에 벌목장이 운영되었을 때
목재를 운반하는 차가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니
이 등산로가 얼마나 편안한 길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뱀사골 대피소를 찍고 마지막으로 제법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니 얼마 안 가 화개재(1,316m)에 이릅니다.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 중 가장 높이가 낮은 고개인데다
경사도 완만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교역로로 이용되던 곳이라고 합니다

(반선(470m)과 화개재(1,316m)는 거리는 9.2km인데 표고차는 846m밖에 나지 않아 전체적으로 9.2%의 경사도).
예전에는 이 고갯마루에서 양 도의 주민들이 각자의 특산품을 가지고 와 물물 교환을 했다고 하는데
예전의 장터는 이제 헬기 이착륙장이 되었고, 장꾼들 대신 산꾼들이 지나다니는 곳이 되었습니다.



화개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삼도봉으로 향합니다.
화개재에서 삼도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런 계단길의 연속입니다.
계단 맨 아래에 보면 '548'이란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계단길의 이름이 '548 계단'인데
혹자는 555계단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이는 600개가 넘는다고도 하고
심지어 1,000 계단이라는 이도 있으니 이 계단의 숫자는 며느리도 모르는가요?

그래서 오늘은 작정을 하고 이 계단의 숫자를 세어 보기로 했습니다.
반복되는 숫자에 헷갈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나하나 세어 봤더니
제 셈으로는 이 계단의 숫자는 '551'개였습니다.
언제 또 이곳을 지나게 되면 검산을 한 번 더 해 봐야 되겠지만
앞으로 이 계단의 이름은 '551 계단'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551 계단을 다 올라서니 시야가 트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암능길을 재촉하니...



드디어 '삼도봉(1,499m)'에 도착합니다.
삼도봉의 옛이름은 '날라리봉'입니다.
이 봉우리의 모양이 낫의 날과 같이 날카로워서 '낫날봉'으로 불리다가
'날라리봉'으로 변형이 된 것인데 '늴리리봉'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금의 '삼도봉'이란 이름은 국립공원 관리 공단에서
이 봉우리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경계점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날라리봉이 훨씬 정감있고 좋지 않나요?



삼도봉에는 정상 표지석 대신 이렇게 쇠로 만든 표지철(?)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안보이는 뒷부분엔 전라남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꼭지가 반들반들하네요.



삼도봉에 서면 처음으로 지리산의 산세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앞쪽으로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 능선이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왼쪽을 돌아 보면 저 멀리 맨 왼쪽편에 천왕봉과 세석평전,
그리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삼신 능선이 보이네요.

아침에 등반을 시작할 때 가이드가 오후 1시 이전에 삼도봉에 도착하면
반야봉을 갔다와도 된다고 했는데
삼도봉에 도착한 시간이 12:00 이었고
전망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나도 12:23 이어서
반야봉으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그동안 지리산 종주를 여러차례 했지만 아직 반야봉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종주 산객의 바쁜 발걸음으로는 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무박 종주의 경우엔 더욱 힘들죠.
사실 이번 산행의 목적 중엔 그동안 지나치기만 했던 반야봉을 오르는 것도 있었죠.



삼도봉에서 400m 쯤 진행하니 반야봉으로 오르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반야봉까지는 1km 남짓입니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경사가 제법 심합니다.
거기다 이미 10여 킬로미터의 등산을 한 후라
반야봉을 오르는 돌길은 제법 많은 땀을 요구합니다.



30여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 끝에 드디어 반야봉의 정상에 도달합니다.
딴 산객에게 부탁하여 인증샷도 한 장 찍어 봅니다. ^^

반야봉은 지리산 주 능선의 서쪽 우뚝 솟아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해발 1,732m로서 높이로만 따지자면 천왕봉과 인접해 있는 중봉(1,875m)보다 낮지만
높이에 관계 없이 명실공히 지리산의 제 2봉으로 불리우며
천왕봉, 노고단과 함께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입니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모습이 여인네의 엉덩이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원래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서 '지혜 또는 밝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반야봉에는 지리산의 산신이자 여신인 '마고(麻古) 할미' 또는 '노고(老姑:노고단 이름의 유래) 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마고 할미는 원래 천신의 딸로서 지리산에 하강하여 산을 둘러 보던 중
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般若)를 만나게 되었고

마고 할미는 반야의 늠름한 모습에 반하여 반야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마고 할미는 반야와 혼인을 하여 천왕봉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슬하에 여덟명의 딸까지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반야는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느끼고 도를 깨우치기 위해 반야봉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마고 할미는 반야가 도를 빨리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산에 있는 나무 껍질을 벗겨 남편이 돌아오면 입힐 옷을 만들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반야는 돌아올 줄 몰랐답니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 할미는 반야를 원망하며
그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합니다.

마고 할미가 갈기갈기 찢은 옷들은 바람에 날리며 반야봉으로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하며
이 때부터 반야봉의 주변에는 안개와 구름이 자주 깨게 되었는데
그것은 천신이 하늘에서나마 마고 할미와 반야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요.

한편 마고 할미의 여덟 딸들은 우리나라의 팔도로 내려가 무당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무당의 원조가 바로 이 마고 할미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천왕봉에는 해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무속인들이
마고 할미의 제를 지내기 위해 몰려 들고 있다고 하네요.



반야봉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조망이 무척 좋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면 가운데엔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이 보이고
그 왼쪽편엔 팔백능선이, 오른쪽편엔 왕시루능선이 남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산그리매들이 정말 그림 같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새창에서 좀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고 할미의 정령이 서려 있는 노고단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로 성삼재 주차장도 조그맣게 보입니다.



왼쪽을 바라보면 반야봉에서 이어지는 지리산의 주능선들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어제 비가 온 덕분에 시계가 맑아서 멀리 세석평전, 천왕봉, 중봉까지 잘 보이네요.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도열한 봉우리들의 이름을 붙여 봤습니다.



반야봉에서 뒤쪽으로 좀 더 진행하면(400m 정도) 중봉(1,732m)이 나옵니다.
천왕봉 뒤쪽에 있는 중봉과 이름이 같은 이 봉우리는
반야봉과 그 높이가 같지만 반야봉의 명성에 가려져 아는 이가 별로 없는데
실제로 와 보면 왜 그런지 이해하게 됩니다.
중봉엔 포지석도 없고 특별한 조망점도 없습니다.



다만 동쪽으로의 조망은 틔여 있어 지리산의 주능선과 천왕봉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은 있으나
이 역시도 반야봉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중봉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곳에 산소가 2기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산소를 쓸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곳에 산소를 쓰면 항상 지리산의 산세를 조망할 수 있은 곳에 누웠다는 점이 좋긴 하겠으나
후손들이 이곳까지 성묘를 오려면 얼마나 큰 수고를 해야 할까요?
예전과 같은 유교, 농경 사회에선 모르겠으나
요즘과 같은 세상에선 이곳까지 성묘를 올 수 있는 후손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후손 중에 산꾼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더군다나 이런 무덤을 쓴 곳은 개인 땅이 아닌 국유지라는 점 또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 숭배 의식 때문에 남의 산에 산소를 쓰는 일에 박하게 하진 않는 풍습이 있긴 하지만
온 국민이 즐겨야 할 국립공원의 봉우리 정상에 이런 무덤이 있는 것에 대해선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네요.



중봉을 뒤로하고 다시 반야봉을 거쳐 노루목으로 내려오는 중간에 점심을 먹었습니다.
새벽에 24시간 영업하는 버거킹에서 사온 더블 와퍼였는데 꿀맛입니다. ^^
사실 산에서 식사 거리로 햄버거를 준비한 건 처음이었는데 맛있네요. 종종 이용해야 되겠습니다. ^^

반야봉을 내려와 능선길과 만나는 지점은 반야봉의 산세가 모아져
노루의 목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는 '노루목'입니다.
밑에서 보면 이곳의 바위의 형태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고...



노루목에서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옛날 '임걸년(林傑年)'이라는 초적의 근거지였다는 '임걸령'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근처에선 관련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이 높은 곳에 산채를 두면 관군에게 토벌당할 위험은 적겠지만
산아래 마을로 일하러(?) 갔다 돌아올 때는 무척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라올 땐 짐도 많을 텐데...



임걸령을 유명하게 한 건 바로 이 샘물입니다.
임걸령 샘물은 지리산에서 가장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샘입니다.
물맛 뿐만 아니고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수량 또한 풍부해서
지리산 종주를 하는 산객들의 필수 취수지입니다.
시원한 샘물을 두 바가지 마시고
물통에 남아 있는 물을 모두 버리고 새로 채웠습니다.



임걸령에서 400m만 더 진행하면 피아골로 내려가는 '파아골 삼거리'가 나옵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하산길입니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피아골 대피소에 이르는 2km는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입니다.
이 곳을 거꾸로 올라오려면 땀 깨나 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길은 대학 시절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하산 길로 이용하던 길이라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예전엔 없던 계단들이 많이 놓여 있어서 생경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피아골 대피소를 지나니 경사가 덜 급해지고 아름다운 피아골 계곡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피아골'이란 이름은 얼핏 들으면 혈액을 의미하는 단어와 연관이 있는 듯 느껴집니다.
또한 지리산은 예전에 빨치산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어서
명선봉, 삼각봉, 벽소령 일대를 '피의 능선'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알고보면 '피아골'의 '피'는 그 피가 아닌 곡식의 한 종류인 '피(기장)'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피아골 아래에 있는 연곡사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척박한 토양에도 잘 자라는 피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이곳을 '피밭골'이라 불렀고
그것이 발음이 변형이 되면서 '피아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피아골을 내려가면 만나는 첫동네의 이름이 '직전' 마을인데
이 '직전(稷田)'이란 이름도 '피를 심는 밭' 즉 '피밭'의 한자어라고 하네요.
어쨌든 피아골이란 이름 참 좋습니다.
저만 그런지 몰라도 피아골이란 이름엔 가슴이 싸리해 지는 어감이 있습니다.



예전에 피아골을 찾았을 적엔 이 어디쯤에서 야영을 하곤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대피소를 제외하고는 야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야영의 기억은 추억 속 한 페이지가 되었네요.



피아골 단풍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 중 하나로 꼽힙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께서는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고서는 단풍을 봤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라는데
계절이 너무 늦은 관계로,
거기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젯밤에 비바람이 심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은 잎사귀도 다 떨어져 버려서
그 유명한 피아골의 단풍이 영 볼품이 없습니다. ㅠㅠ
지난주가 절정이었다고 하던데 한 주만에 이렇게 되었네요.
가이드 말을 빌리자면 어제도 단풍은 꽤 괜찮았다고 하니
어젯밤의 비바람이 주범인 것 같습니다.



이곳은 만산이 홍엽으로 불타고(山紅)
붉은 단풍이 물에 비쳐 물빛 또한 붉어지니(水紅)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도 붉어진다(人紅)고 해서

삼홍소(三紅沼)라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 역시 단풍은 모두 지고 없으니
열받은 사람 얼굴만 붉어지네요.



통일소를 지나 연주담 근처에 오니 발을 담글 만한 곳이 있어 땀을 씻고 새옷으로 산뜻하게 갈아 입고
직전 마을로 내려오니 이제서야 덜 떨어진 단풍잎들이 드문드문 보이네요.



16:50에 오늘의 등산을 마칩니다. 7시간 40분 걸렸는데 버스 출발 시간이 17:30이니 늦진 않았군요.



대학 시절 피아골을 내려와 만나는 마을은
아직도 우리나라에 이런 마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물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시중에서 파는, 소위 말하는 cigarette를 피웠으나
이 마을 사람들은 담배 가루를 신문지 종이에 말아 피우는 등
기초적인 생필품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 것 같았고

거주하는 가구수도 정말 적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것은 물론 마을도 훨씬 규모가 커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농촌의 상황과는 반대의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요즘 유명한 등산로 주변의 풍경입니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어
함께 하산한 산객들과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단풍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30년 전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산행이었고
반야봉을 올라 지리산 전체의 산세를 조망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의의였던 것 같습니다.

단풍과 더불어 또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카메라가 일찍 꺼져 버려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는 것.
특히 반야봉에서의 조망 사진이 아쉽네요.


산행기록

반선(480m, 9:10) - 6.0km, 1:35 - 간장소(850m, 10:45) - 3.2km, 0:52 - 화개재(1,316m, 11:37) - 0.8km, 0:23, - 삼도봉(1,499m, 12:00-12:23, 0:23휴식) - 1.4km, 0:37 - 반야봉(1,732m, 13:00) - 0.4km, 0:10 - 중봉(1,732m, 13:10-13:14, 0:04휴식) - 0.4km, 0:08 - 반야봉(1,732m, 13:22-13:33, 0:11휴식) - 1.0km, 0:18, 0:20점심 - 노루목삼거리(1,498m, 14:11) - 1.3km, 0:18 - 임걸령(1,320m, 14:29-14:36, 0:07휴식) - 0.4km, 0:07 - 피아골삼거리(1,336m, 14:43) - 2.0km, 0:35 - 피아골대피소(780m, 15:18) - 4.0km, 1:02, 0:30휴식 - 직전(420m, 16:50)


총 이동 거리 :      20.9km
이동 시간     : 6시간 05분
휴식 시간     : 1시간 35분
총 소요 시간 : 7시간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