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선생님과의 대화 때문에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어 하회 탈춤을 시작할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하회 탈춤 공연장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니 탈춤 공연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집사람과 애들이 미리 잡아둔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마가렛과 우리 식구들은 일찌감치 온 덕분에 한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회 탈춤은 원래 하회 별신굿의 한 부분입니다. 하회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과 4월 초파일에 동제가 지내졌고, 이와는 별개로 3년,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씩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이 있을 때 별신굿이 행해졌는데, 이는 마을의 성황신에게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게 해 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별신굿은 성황신을 굿판으로 모셔오는 의식인 강신(降神), 마을의 염원을 들어주게 하기 위해 모셔온 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 마당인 오신(娛神), 돌아가는 신을 배웅하는 송신(送神),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하회 탈춤은 오신 부분에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던 것인데, 최근에 와서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하회 탈춤의 내용은 지배 계층인 양반과 선비, 스님(탈춤의 시대적 배경이 고려말이라 스님도 지배계층이었음)들에 대한 풍자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항상 점잖고, 근엄하기만 한 이들이지만 사실은 서민들과 다를바 없는,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속물 근성이 있음을 풍자하는 내용입니다.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평민들은 굿판에서나마 그들의 지배 계층인 양반과 선비들의 위선과 타락을 폭로하고, 불교의 타락상을 드러냄으로써 이 굿 판은 한 바탕 속시원한 스트레스 해소의 마당이 되었을 것입니다.
굿의 내용이 이러한데다 조선 시대의 양반과 선비들은 원래 무속을 배척하였으므로 양반들은 이 굿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정서로 봐서는 금지하지 않으면 다행이었겠지요. 그러나 하회 마을의 양반들은 별신굿이 행해질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도 해 주기도 하였다고 하니 이 마을 양반들의 너그러운 품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탈놀이를 통하여 평민들의 억눌린 감정이 마음껏 발산됨으로써 반상간의 갈등을 풀고 조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회탈의 제작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고려말 이 마을에 허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히 이웃집 처녀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던 중, 꿈 속에서 집안에 금줄을 치고 신이 계시한 열 두 개의 탈을 완성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 날부터 탈 제작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수 개월 후 열 한 개의 탈이 완성되고 열 두 개째인 이매탈을 제작하고 있을 때 허도령을 사모하던 이웃집 처녀가 궁금한 나머지 금줄을 넘어 허도령이 탈을 만드는 장면을 훔쳐 보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허도령이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매탈은 턱이 없는 미완성인 상태로 전해져 내려오며 하회 별신굿은 이 허도령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일설에는 마을에 돌림병이 돌자 이를 걱정하던 허도령의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탈 12개를 만들어 자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돌림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고, 허도령은 그 후 산 속에 움막을 짓고 탈 제작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탈이 완성되어갈 무렵 허도령을 사모하던 처녀가 금기를 어기고 움막의 문을 여는 바람에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 옵니다.
허도령이 태어난 해인 무진년과 그 외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행되던 별신굿은 1928년 무진년의 굿을 마지막으로 맥이 끊어졌었는데 최근에 와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하회탈은 모두 12개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중 총각, 떡다리, 별채 탈 등 세 개는 분실되었고 나머지 9개는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1000년에 달하는 오랜 역사와 뛰어난 조형미를 인정받아 탈로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회 별신굿에는 강신, 무동 마당, 주지 마당, 백정 마당, 할미 마당, 파계승 마당, 양반 선비 마당, 헛천 굿거리 마당, 혼례 마당, 신방 마당 등 모두 10개 마당이 있는데, 강신, 무동 마당은 신을 불러서 무동을 태운뒤 놀이 마당으로 모셔오는 '강신'의 의식에 해당하고 주지 마당, 백정 마당, 할미 마당, 파계승 마당, 양반 선비 마당은 신을 즐겁게 해 주는 '요신'의 의식이며 헛천 굿거리 마당, 혼례 마당, 신방 마당은 신을 대접한 뒤 배웅하는 '송신'의 의식에 해당합니다. 현재 하회 탈놀이로 공연되고 있는 것은 중간 부분, 요신의 의식에 해당하는 주지 마당, 백정 마당, 할미 마당, 파계승 마당, 양반 선비 마당 등 5개 마당입니다.
첫째 마당은 주지 마당입니다. 주지는 신성하고 무서운 상상의 동물인데, 삼베 포대기를 뒤집어 쓴 한 쌍의 주지가 서로 마주보며 춤을 추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을로 모셔온 성황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 의식의 첫 마당으로서 잡귀와 사악한 것을 몰아내어 굿판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암수의 싸움에서 암컷이 이기게 되는데, 이것은 다산(多産)과 풍농(豊農)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 아래는 하회 탈춤의 장면들을 사진에 담아봤습니다. i-frame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마우스 휠이나 우측의 콘트롤 바를 사용하여 화면을 아래로 내리면 여러장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마당은 백정 마당입니다. 망태기에 도끼와 칼을 넣고 등장한 백정이 주인없이 어슬렁거리는 소를 보고 본능적으로 소를 때려잡습니다 그리고는 소의 배를 갈라 염통과 불알을 떼네어 구경꾼들에게 이를 사라고 희롱합니다.
백정의 거칠 것 없는 몽두리 춤과 소를 발견하자 단숨에 때려잡는 행동, 소불알을 두고 '공자도 자식 낳고 살았다.', '자식을 볼려면 양기가 있어야 하고 양기게 세려면 바로 이 소불알을 먹어야 한다'면서 외치는 언행은 체면과 체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한 양반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여기서 관중들은 점잖지만 나약하고 위선에 찬 양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솔직담백하고 대담한 백정의 행동에서 기존 권위를 깨부수는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셋째 마당은 할미(할머니) 마당입니다. 할미는 베틀에 앉아 베틀가를 부르는데, 시집간지 사흘만에 과부가 되어 일생을 고단하고 처량하게 살아야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일평생 시댁과 남자들에게 봉사만 하는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 시대 여자의 지난한 생이 애처로운 가락에 실려 나옵니다. 그러나 베틀가가 끝나고 난 뒤 남편과의 대화에서 할미는 관중들의 예상을 유쾌하게 깨 버립니다. 어제 장에서 사온 청어 한 두릅 다 먹었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할미는 어제 저녁에 당신 한 마리 나 아홉 마리, 오늘 저녁에 나 아홉 마리 당신 한 마리 먹고 남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대들고 나섭니다.
할미 마당 역시 기존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이 유쾌한 해학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이 강해지는 것은 예전부터 그랬나봅니다.
다음 마당은 파계승 마당입니다. 항상 성자처럼 행동하는 스님이지만 우연히 만난 부네의 아름다운 모습에 춘심이 발동하여 본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부네와 놀아난다는 내용인데, 하회 탈춤이 처음 시작되던 고려 말엽 불교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마당은 양반, 선비 마당입니다. 양반과 선비가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데, 처음에 두 사람은 길바닥에서 큰 절을 하는 등 양반, 선비로서의 체통을 과할 정도로 차리지만 대화가 진행되면 서로 자신의 양반 자랑, 학식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예쁜 여인이 나타나자 서로 수작을 걸고, 백정이 등장하여 이들에게 소불알을 사라고 하자 처음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위인들이 정력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는 내용인데, 스님과 마찬가지로 위선에 싸인 양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허위와 위선에 가득찬 양반, 선비에 대한 할미의 지독한 독설로 하회 탈춤의 마지막 마당인 양반 선비 마당이 끝나고 모든 출연자들의 인사와 마지막 뒷풀이 풍물로 모든 공연은 끝납니다.
하회 탈춤은 별신굿의 일환으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 마당이지만 지배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통하여 평민들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배 계급의 억압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울분과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으니 하회 탈춤은 계급 갈등의 장소가 아니고 계급 화합의 장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식 선배들의 배려로 야자 타임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후배간의 서열이 바뀜으로서 후배는 스트레스를 풀고, 선배는 후배의 고충을 헤아리게 되듯이 하회 탈춤도 하회 마을 사람들의 야자 타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하회 마을의 양반들은 이 별신굿에 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제정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이 마을 양반들의 너그럽고 사려깊은 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회 탈춤은 동절기(12월 - 이듬해 2월)를 제외하면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상설 공연을 갖고 있으니 이 마을에 들리는 이들은 시간을 맞춰서 한 번 씩은 보고 갈 일입니다.
차를 몰고 하회 마을을 빠져 나왔습니다. 풍산 읍내로 나오다보니 한지 전시관이란 곳이 눈에 띕니다. 하회 마을이 속해 있는 풍산읍은 한지 공업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마가렛은 물론이고 우리 식구들도 아직까지 한지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므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한지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들어 놓은 전시관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한지로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심지어 한지로 만든 옷까지 있더군요. 마가렛과 아내는 한지로 만든 함과 예쁜 포장지를 샀고, 형섭이는 한지로 만든 노트를 하나 샀습니다. 글씨만 잘 써넣으면 우리 조상들이 읽던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제사 지낼 때 축과 지방을 쓸 종이를 좀 샀습니다.
전시관을 나오니 바로 옆은 한지 공장입니다. 이곳에는 직접 한지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서 형섭이와 윤섭이는 직접 한지를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닥나무를 풀어놓은 물에 채처럼 생긴 물건을 넣어 걷어 올리니 고운 닥나무 입자들이 한겹 얇게 올라 붙습니다. 이것을 잘 펴놓고 말리면 종이가 됩니다.
종이가 마를 동안 안쪽의 한지 공장도 구경했습니다.
한지
공장 옆에는 한지 미술 전시관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형형 색색의 한지를
뜯어 붙혀서 만든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수채화나
유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겹의 한지를 찢거나
뜯어 붙혀서 그린(?) 그림입니다. 색감과 질감이 무척 좋습니다. 마가렛은
여기서 판매하는 조그만 그림도 하나 샀습니다. 이곳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별
생각없이 들어간 한지 전시장이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애들에게도 좋은
체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모두들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합니다.
춘천에서의 저녁 메뉴는 전 번과 같이 닭갈비로 했습니다. 마가렛은 저희 식구와 처음 춘천의 닭갈비를 먹어본 후에 이 음식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되었답니다. 그 후로 기숙사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고 딴 사람들과 사먹기도 했다는데, 전번의 그 집 만한 맛이 안나더라고 합니다.
2 개월 여 만에 다시 그 집을 찾았습니다. 전번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오늘은 그다지 붐비지 않습니다. 전번과 같이 닭갈비와 막국수를 시켰습니다.
여전한 맛. 배부르게 먹고 오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종일 제법 빡빡한 일정으로 움직였더니 많이 피곤합니다. 내일은 월요병이 심할 것 같습니다.
※ 이 글의 맨 윗편에 실려 있는 탈춤 사진과 그 아래의 아홉 개의 하회탈 사진은 역시 전번과 마찬가지로 http://anu.andong.ac.kr/~shryu/ 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그밖에 하회 탈춤에 관한 많은 자료도 이곳의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허락을 얻고자 했으나 해당 홈페이지가 이미 폐쇄된 터라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혹시 관계자가 보신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9 개의 하회 탈에 대한 설명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시면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