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장에서 청두에 도착한 후엔 며칠 전 청두로 들어올 때 묵었던 호텔에 다시 한번 묵고
다음 날, 아침 오후 3시 20분에 탑승할 비행 시간까지의 짧은 틈을 활용하기 위해 청두 시내로 향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을 다니긴 힘들 것 같아서
제갈 공명의 위패를 모신 무후사와 그 옆의 금리 거리만 돌아보고 오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는 대표적인 사천 면요리 중 하나인 '단단면(担担面)'을 먹기로 했습니다.
여행 안내서에 나와 있는 단단면 집이 문을 닫은 바람에 약간 헤매긴 했지만
결국 남춘소흘(南春小吃)이란 곳으로 갔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집이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집이었던 것 같았습니다(이름이 바뀐 듯).



매운 걸로 줄까 안 매운 걸로 줄까 묻길래 아침부터 매운 걸 먹으면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안 매운 것으로 시켰는데 나온 면을 한 입 먹어 봤더니 아주 밍밍한 맛입니다.
맵지 않은 건 이렇게 밍밍한 맛인가 하면서 한 입 더 먹으려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킥킥 웃으면서 손짓으로 저어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면을 저어 봤더니 면 아랫쪽에 양념이 들어가 있더군요.
이렇게 잘 섞어 놓으니 색깔도 그렇 듯하고 맛도 아주 맛있더군요.
자장면과 비슷한 느낌도 살짝 나는데 면의 식감도 독특하고 양념도 독특한데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지만 암튼 무척 맛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도 객잔의 저녁 식사 다음으로 매력적인 맛이었다는...
한국에도 단단면을 파는 곳이 있다는데 언제 한번 먹어 봐야 되겠습니다.



물만두도 시켰는데 안내서엔 매운 맛인 홍유초수가 맛있다고 했는데
매운 단단면을 안 먹은 것과 같은 이유로 맵지 않은 청유초수를 시켰습니다.
맛은 우리나라 물만두와 비슷한 맛이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무후사를 둘러 보러 나섭니다.
그런데 이때 제 카메라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단단면 사진 찍을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던 카메라가
아침을 먹고 나서 찍으려고 하니 거리 조절 링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물럭거려 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거리 조절 링을 움직이는 부품에 기계적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올리는 사진은 모두 아들의 사진기로 찍은 사진입니다.
제가 아들 사진기를 들고 찍은 컷도 일부 있고 찍어야 할 장면들을 제가 지정해 주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아들 녀석이 찍었네요.
아들 녀석은 기록 정신에 투철한 사진 찍기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나중에 점검해 보니 약간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사진은 대충 다 찍은 것 같네요. ^^



이곳이 무후사의 정문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무후사는 아니었고(어쩐지 입장료를 안받더라니...)
무후사 옆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는데



진짜 입구는 그 안쪽에 있었고 입장료도 받고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안내도를 보니 우리가 들어온 곳은 정문은 아니고 중문이더군요.
사진 속에서는 한가운데 쯤 둥근 원이 보이는데 그 곳이 유비의 릉인 혜릉이고
그 바로 아래 왼쪽이 우리가 들어온 중문입니다.
그리고 정문은 사진 오른쪽 아랫쪽에 사람 손가락이 닿아 희게 된 부분입니다.
보통은 정문으로 들어가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한소열묘와 무후사를 돌아 보고
왼쪽 위쪽으로 이어지는 공명원과 혜릉을 돌아보는 동선을 따릅니다.  



덕분에 일반적인 관람 순서인 한소열묘→무후사가 아닌 유비의 묘인 한소열릉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한소열릉 현판을 지나 조금 걸어 가면



유비의 능인 혜릉이 나옵니다.
혜릉으로 들어가는 문위엔 '천추름연(千秋凛然)'이라고 적혀 있는데
영웅의 기세는 천년이 지나도 늠연하다는 뜻이랍니다.



한소열황제지릉이라고 쓴 듯한데 마지막 자가 지워졌군요.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무리한 전투를 일으킨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대패한 후
수도인 청두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병을 얻어 이 년 후 쓸쓸히 백제성에서 죽었는데
그의 사후 이곳으로 이장하여 혜릉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릉은 황제의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소박한 규모인데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도굴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유비가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는 값나가는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도굴꾼들이 털어 봤자 특별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라는 설도 있고
그동안 유비의 묘를 도굴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게 진짜인지 확인할 길은 없군요.



혜릉을 나와 본 건물로 가는 길엔 삼국지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하고 있는
'고백제(古柏齊)'라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고백제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아 보니 유명한 시인 두보가 무후사를 찾아
무후사 마당에 자라고 잇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보면서
측백나무의 기개를 공명의 충절에 비유하면서 지은 '고백행(古柏行)'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는데
'고백제(古柏齊)'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 '고백행(古柏行)'에서 따온 이름인 것 같습니다.



고백제 입구엔 삼국지의 유명한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유비가 공명을 모셔올 때의 일화인 삼고초려입니다.



이것은 적벽대전이고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 주었다는 칠종칠금



공명의 기산 육회 출격



공명의 초상화인데 그 위엔 1958년 3월 모택동이 이곳을 방문한 사진이 붙어 있군요.



유비를 보필한 5명의 뛰어난 장수인 오호상장.
왼쪽부터 관우, 장비, 조자룡, 황충, 마초입니다.



관우는 그 뛰어난 충절과 기개로 인해 후세에 황제와 신의 반열에 올랐으니
주군인 유비보다 더 숭앙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건 무슨 장면인가요?



고백제 옆엔 삼국 문화 진열관도 있었는데
삼국 시대 풍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같은 곳이었습니다.



험하기로 유명한 촉잔도의 모형이 있어 사진을 한번 찍어 봤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전투를 설명한 그림도 있었는데
이것은 조조가 원소를 대파하고 시대의 패권을 잡는 계기가 된 관도 대전 장면이고



이 전투는 오촉 연합군이 조조의 100만대군을 패퇴시킨 그 유명한 적벽대전



이 장면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모한 전투에 나섰다가 결국 크게 패하고
본인마저 병사하는 계기가 된 유비의 이릉 전투 장면입니다.

이제 혜릉을 벗어나 무후사 정문으로 가서 무후사 관람을 제대로 시작합니다.



무후사의 도입부엔 명대와 당대에 만들어진 비석이 있는데
이 비는 명비로서 1547년 장시철의 문장과 고등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비랍니다.



명비의 맞은 편엔 당비가 있는데 이 비는 80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시기 유명한 재상인 배도가 문장을 짓고 서예가 유공작이 글을 쓰고 명장 노건이 서각을 했는데
이 비석은 문장, 서법, 서각이 모두 뛰어나 삼절비(三絶碑)로 불리고 있다고 한답니다.



유비전이라고도 불리는 한소열묘의 입구엔 '명량천고(明良天古)'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글귀는 '明君良臣 流傳千古'에서 따온 말로서
'현명한 군주(明君)와 훌륭한 신하(良臣)가 만나 오래도록 수범이 된다'란 뜻이라고 합니다.
흔히 유비와 공명의 관계를 물과 고기의 관계란 뜻인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하는데
본인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물이 되는 현명한 군주를 만나
공명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게 되니 수어지교란 성어가
이 두 사람의 관계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 같습니다.
명량천고의 글자 중 '明'자를 보면 날 日변이 아닌 눈 目변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현판을 쓸 당시가 반청 운동이 있던 청나라 시대였기 때문에
한족의 국가였던 명나라를 떠올리는 글자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고
날 日변의 밝음은 자연의 밝음이지만 눈 目변의 밝음은 인지(人智)의 밝음을 뜻하는 글자로서
유비의 인덕이 그만큼 밝고 지혜로웠다는 의미라는 말도 있답니다.



한소열묘의 문을 들어서 유비를 모신 사당으로 걸어갑니다.



사당 현판엔 '업소고광(業紹高光)'이라고 적혀 있는데
유비가 자신의 선조인 한고조 유방과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 유수의 대업을 이어 받아
크게 발전시킨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크게 발전시키고자 했던 업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본인은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되지요.


정면에는 유비의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상을 비롯해 여기에 전시된 모든 상들은 모두 청대에 만들어 진 것들로서
찰흙으로 빚은 소상이라고 합니다.



유비의 왼편엔 관우의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관우가 황제의 관을 쓰고 있음을 알수 있는데
관우는 만고에 빛나는 충절로 인해
사후에 황제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관을 쓰고 있답니다.



유비의 오른쪽에는 유비의 아들이 아닌 손자 유심의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유비의 사후 그의 아들 유선이 보위를 물려 받았으나
나라가 위태로워 졌을 때 위나라에 투항하였는데 그 아들인 유심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였고 
아버지가 항복을 결정하자  비의 묘 앞에서 자결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비의 사당엔 아들 대신 끝까지 절개를 지킨 손자가 모셔져 있는 것입니다. 



사당 양 옆으로는 유비를 따르던 여러 문신과 무신의 소상이 전시되어 있는 무장랑과 문신랑이 있습니다.



낮에는 솥으로 쓰고 밤에는 경고를 알리는 북으로 썼다는 제갈고라고 생각하고 찍었는데
가만 보니 북의 몸통 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져 제갈고는 아닌 것 같고 그냥 전고가 아닌가 싶네요.



한소열묘와 무후사를 이어주는 과청에는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기산으로 출격하면서
후주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가 있습니다.
출사표는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가기 전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인데
제갈량의 올린 이 출사표는 천하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어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도 울지 않으면 충성심이 없고
이밀의 진정표를 읽고도 울지 않으면 효심이 없고
한유의 제십이랑문을 읽고도 울지 않으면 자비심이 없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지요.



여기에 새겨진 이 출사표를 쓴 사람은 남송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악비(岳飛)'입니다.
악비는 훌륭한 무장이기도 했지만 당시 남송에서 제일가는 명필로 손꼽힐 정도로 글씨를 잘썼는데
그가 남하하던 금군을 대파하고 중원을 진출할 때 남양을 지날 무렵
갑자기 비가 내려 무후사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다음날 악비가 떠나려고 하자 무후사의 관리인이 휘호를 부탁했고
악비는 이곳이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 무후사임을 생각하고 제갈량이 남긴 불후의 명문인 출사표를 썼답니다.
악비는 이 출사표를 쓰면서 감정이 점점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며 글을 썼다는데
출사표의 시작은 단정한 해서체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으로 갈수록 행서체와 초서체로 바뀌는 것은 그런 이유라고 하는군요.

그 당시 악비는 기울어 가는 남송을 지탱하는 장수로서
승리의 가능성이 많지 않은 전투를 이끌고 있었으니
유비가 죽고 유선이 보위를 물려받은 후 천하 통일은 커녕
촉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떡해서든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의 심정이
자신의 처지에 이입되었을 터이고
그래서 악비의 눈물은 더욱 뜨거웠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은 후 받은 시호가 '충무후(忠武侯)'이고
금군과의 전쟁 중에 화친파의 농간에 빠져 억울하게 죽은 악비가 받은 시호도 '충무왕(忠武王)'입니다.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한 '충무공(忠武公)'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忠武의 忠臣들이 '명량'의 계절에 만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핍니다.



이제 유비전인 한소열묘를 지나 공명전인 무후사(武侯祠)로 들어섭니다.
이 무후사라는 글씨는 쓰촨성 출신의 역사학자인 곽말약이 썼다고 하는데 글씨가 힘찹니다.

제갈량의 위패를 모신 무후사는 중국 내의 여러 곳이 있으나
촉한의 수도였던 성도(成都)에 있는 이 무후사가 원조이고 가장 유명합니다.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성도 인근의 면양(沔陽)에 있는 정군산(定軍山)에 묘를 조성하고 무후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후 남북조 시대에 성도에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이
무후사가 도시에서 떨어져 있어 백성들이 찾아가기 불편한 것을 고려하여 성도 시내로 옮겼다가
14세기 명대에 와서 불타 버린 무후사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 자리로 옮겨 오면서 유비의 묘와 합쳐져 전국 유일의 군신 합동 사당이 되었답니다.
현재의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라고 하네요.
유비보다 공명이 더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긴 하지만 군신의 법도는 엄정한 것이어서
이 사당을 대표하는 이름은 한소열묘이고 정문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건물도 한소열묘이며,
한소열묘를 지나야 비로소 무후사가 나오지만
사람들은 이 사당을 한소열묘로 기억하기 보다는 무후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무후사는 여러곳 있지만 한소열묘는 따로 있지 읺지요.



무후사엔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워낙 뛰어난 인물이어서 그 이름이 온 우주에 드리운다는 뜻입니다.



공명전에 모셔진 공명의 소상입니다.
공명전의 편액은 '정원당(靜遠堂)'인데
이는 제갈량이 쓴 글 중에서 '녕정이치원(寧靜以致遠)'에서 따온 말로서
'평안한 침묵으로 영원을 관조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공명전의 한쪽 벽에는 악비가 쓴 출사표가 나무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악비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를 모두 썼는데 여기엔 전출사표만 적혀 있군요.



공명전 옆을 돌아 나오니 이런 호젓한 휴식 공간이 나오고



길은 공명이 유비의 묘소를 돌보는 시묘 생활을 했다는 공명원으로 이어지는데
아쉽게도 공명원은 공사 중이라 돌아보지 못했네요.



무후사 뒷편엔 세사람의 의로운 이, 즉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을 모신 '삼의묘(三義廟)'가 있습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의중도원(義重桃園)' 이라고 적혀 있는데
'도원에서 나눈 깊은 의리'라고 하면 되려나요?


사당 안에는 의형제를 맺은 삼형제의 소상이 있는데



아직 관직에 나서기 전의 모습이라



소박한 복색을 하고 있군요.

잠시 삼국지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 무후사 탐방은 삼의묘 답사로 마무리 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아는 삼국지는
나관중이 상상력을 많이 발휘하여 각색한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입니다.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점이 많아서
악인은 더욱 악하게 의인은 더욱 의롭게 기록되어
등장 인물들의 실제의 모습이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후세에 오면서 점점 살이 붙고 과장이 심해지기도 하고요.
공명이 그렇고 관우가 그랬으며
그런 측면에서 가장 억울한 이는 아마도 조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왜곡은 어느 시대에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구해줄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마음의 발로일 것입니다.
일신의 영달과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위국헌신의 마음으로 민중을 이끌어 줄 영웅이 부재한 요즘이기에
무후사를 돌아본 뒤 느끼는 감상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무후사의 북문을 나오면 바로 금리(錦里) 거리와 연결됩니다.



이곳은 삼국 시대를 주제로 조성된 테마길로서
삼국 시대의 풍물과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라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인파에 밀려 다니다 보니 삼국시대의 분위기를 느껴 볼 틈이 없네요.
더군다나 우리는 바로 하루 전 리장의 천년 고성을 제대로 둘러 보고 왔으니
이렇게 최근에 와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거리가 성에 찰 리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건성건성으로 대충 돌아보고 가기로 하는데...



아 이건 뭔가요?
모양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 먹던 그것 아닌가요?
국민 학교 앞 좌판에 칼, 배, 자동차, 비행기 모양의 설탕 과자들을 잔뜩 늘어 놓고 우리를 유혹한,
주머니돈 깨나 갖다 바쳤던 바로 그 또뽑기 아닙니까?
아 추억의 과자네요.



하나 사 먹어 봅니다.
아들 녀석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 봤지만
너도 내 나이 돼 보면 알거다.
이건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추억을 먹는 거라는 걸...
그때 쯤 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 먹거리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요?



햐! 중국의 스케일이 크긴 큽니다. ^^



금리 거리가 끝나 갈 무렵 만난 '성파극가배(星巴克咖啡)'입니다.
중국어 발음은 '씽빠크카피'인데
바로 우리나라의 별다방, '스타벅스'입니다. ^^
우리나 중국이나 별다방이라고 하긴 마찬가진가요? ^^
중국은 모든 외국 브랜드의 이름을 이처럼 자국 말로 바꾸는데
이 이름이 해당 브랜드의 고유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도
한자로 뜻을 풀었을 때 좋은 뜻이 되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星巴克咖啡도 꽤 잘 된 작명인 것 같습니다.



성파극가배에서 냉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금리 거리를 떠나 공항으로 향합니다.



5박 6일에 걸친 호도협, 옥룡설산, 리장 여행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2시간이나 지연 출발한 비행기가 우리를 약간 짜증나게 했지만
(사진 오른쪽을 자세히 보면 비행기 출발 예정 시각이 15:20이고 현재 시각은 15:24이건만
전광판 안내는 지연 출발된다는 안내 없이 정상 출발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덕분에 공항 서점에서



우리 대통령의 자서전을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국적기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뭉클한 법인데
현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지지 여부를 떠나
외국 공항 서점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코너에 진열된 대통령 자서전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린 끝에 겨우 도착한



사천 항공을 타고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 옵니다.

시루오루(西若如)! ... 



이번 여행은 저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큰 여행이었습니다.
3년 전 등산에 관심이 생긴 이후 조금씩 생겨나던 해외 트레킹에 대한 열망을 드디어 이루었고,
아들과 단 둘이서 떠난 첫 해외 여행이었으며
그것도 좀처럼 마음 먹기 힘든 고산 지대 트레킹을 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요.



중도 객잔에서 나눴던 설산 맥주의 추억과



호호탕탕한 호도협의 격랑.



그리고 중국 공인 해발 5,100미터의 망설봉을 가쁜 숨을 나누며 올라가던 기억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나 아이나 모두 팔팔한 체력으로
이런 고지대 트레킹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큰 아이와 저에게 있어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바로 이번 여행이 아닐까요?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